인아와 태정 이야기
또 잠을 설쳤다. 야근을 하는 바람에 사무실에서 무의식적으로 커피를 한 잔 내린 것이 화근이었다. 커피를 몇 잔이나 마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늘 내가 마시는 커피는 권장량을 초과하기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서 개운함을 느낀 것이 언제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매일같이 야근을 하고 야근의 친구라도 되듯 진한 커피를 마시고 귀가하여 쓰러지듯 잠에 드니 아침이 상쾌할 리 만무했다. 사람들은 내게 너무 악착같이 산다고 했다. 요샛말로 ‘워라밸’이라고 했던가. 내게는 그런 것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누가 보아도 나는 심각한 워커홀릭이었다.
연말은 늘 바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처리’해야만 하는 일들이 한 달 전 즈음부터 쌓여갔고, 의례적으로 수많은 지인들과 식사를 해야만 했다. 내게는 크리스마스의 기분은커녕 마음을 푹 놓은 채 캐럴 한 곡도 들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무얼 위해 이토록 숨 가쁘게 사는 것일까. 내가 받는 월급은 딱 ‘남들만큼’이었다. 연말이 되니 좋은 점은 단 하나, 보너스의 기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희망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지만 나는 매년 희망을 품었고 그 달콤한 희망 시간의 끝에는 정말이지 너무 작아 티도 나지 않는 보상이 있었다. 올해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 역시 매년 고이 접어 마음에 담았다. 왜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일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임을 항상 잊은 채 부푼 희망을 꾸준히 키워나갔다. 아마 어느 순간, 풍선처럼 바람이 가득 담긴 희망은 펑, 하고 터져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때가 되면 나는 손을 쓸 새도 없이 무너지는 마음을 감당해야만 하겠다. 인생이 그런 것들의 연속이라면, 조금, 아니 꽤 많이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 구석구석마다 점점 부풀고 있는 풍선들이 가득하다면. 어쩌면 그것은 언제 기어 나와 나를 죽음으로 이끄는 암세포와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큰 희망’이란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아 선배, 퇴근 안 하세요?
어김없이 나의 퇴근 시간을 확인하러 후배가 내게 왔다. 상사들은 진작에 퇴근길에 오르고 없었다. 사무실을 둘러보니 내 자리를 제외하고 모두 불이 꺼져 있었다. 나를 혼자 두고 가기 미안하다며 매번 나의 퇴근 시간을 확인하곤 하는 태정이었다. 그는 고작 나와 일 년 남짓밖에 차이 나지 않는 신입사원이었지만 내게 참으로 깍듯했다. 하루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내게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제발 홀로 남아 있지 말란다. 지켜 줄 수 없다는 말도 슬쩍 흘렸다. 나는 못 들은 체 넘겼지만 그는 가끔 내게 ‘남자 행동’을 하려 했다.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알 것 같았다. 회식자리라도 있다면 은근슬쩍 그에게 선을 긋는 말을 건넸을 것이지만, 나는 늘 회식자리에 참석하기 조차 어려웠다. 이런저런 개인 사정과 무수한 야근이 겹치다 보면 그토록 좋아하던 ‘술 한 잔’ 마저도 취할 수 없었다. 인생이 참 퍽퍽했다.
“이제 가야죠. 태정씬 왜 아직 퇴근 전이신가요?”
“선배가 가셔야죠. 그리고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으면 무섭잖아요.”
내가 무서워할 거라는 건지 그가 무섭다는 건지 참으로 애매한 말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서둘러 책상을 정리했다. 서류들을 대충 파일에 끼워 넣고 노트북을 껐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10시였다. 괜히 일을 더 하고 가겠다고 남아 있다가는 정말로 그가 나를 두고 그냥 가 버릴 것만 같았다. 다시는 나에게 애인처럼 구는 말과 행동을 못하게 따끔하게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항상 그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정말 기대게 될까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일 처리를 잘한다는 것은 칭찬받고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었지만 누구의 찬사도 나를 기쁘게 만들지는 못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나의 모습이 어떤 사람에게는 참으로 안쓰럽게 비치어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을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문득 나의 정신을 깨워준 것은, 그의 말이었다.
“가끔은 말이에요, 선배가 사람이 맞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요. 무엇이든 혼자 척척 하시잖아요. 물론 신입 나부랭이인 저한테는 정말 대단해 보이죠. 아, 이거 아부 아니고요, 결코 작업 거는 말도 아니고요, 물론.”
이런 사설을 달고 시작한 그의 말은 내가 점차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고 마침내 그는 나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안쓰럽다는 이야기를 했다.
절대 실수하지 않으시겠지만, 절대로 문제 생길 일은 없겠지만요, 가끔은 좀 인간적이셨으면 좋겠다 싶어요. 이미 찍힌 마당에 무슨 말이든 못 하겠냐고 하실지도 모르지만, 진심으로, 안쓰러워요.
넌 왜 그러냐는 한심한 표정이 아니었다. 자칫하면 그의 말을 오해할 수도 있어 내가 기분이 나쁠 걸 대비하여 그는 ‘진심으로’라고 말하며 내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담배를 태우지 않음에도 옥상 올라갔다 오기를 반복한다는 그가 나를 옥상으로 데려가 한 말이었다. 솔직히 말해, 하마터면 후배인 그에게 반할 뻔했다. 여태껏 연애를 못한 탓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요샛말로 ‘금사빠’가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었다. 실은 금방 사랑에 빠지는, 매우 사랑이 고픈 여자였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나의 외로움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혼자 사는 여자라는 것만으로도 쉽게 보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겨우 이런 이야기 하려고 옥상에 올라오자고 하신 건가요?”
감정에 휘둘리기 싫어 시선을 회피하며 그에게 타박을 주듯 말했다. 순간 나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빨려 들어갈 뻔했지만,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로 잘 모면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후회는 했다. 그때까지 나의 어떤 말에도 상처를 잘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태정에게 쏟아낸 무수한 말들이 그의 폐부를 얼마나 찔렀는지 정확하게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인수인계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하며 사적인 이야기도 나눌 수밖에 없었던 그 시간을 굳이 기억해내지 않아도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매사에 철저하고 또 그만큼 까칠한 나의 성격 때문이었다.
‘가끔은’ 인간적이었으면 좋겠다는 그의 말은 정확히 나의 심장을 관통했다. 학창 시절에도 들었던, 꽤 오래된 질책이었기에 더 훅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내 안쓰럽다는 진심 어린 말은 뚫린 심장을 다시 가득 채웠다. 그는 이토록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주가 있었다. 홀로 쌓아온 무수한 노력들이 그의 말 몇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이 말은 곧, 외로움을 철저히 숨기고 살아온 내가, 내 인생 전부가, 부서져 버렸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