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모를 나만의 제시를 기다리며

도도한 파리 4

by 리아

나는 책을 참 좋아한다. 영화도 무척 좋아한다. 그 두 가지 좋아하는 것들이 만나 나는 파리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찾았다. 파리 여행의 시작 역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였다. ‘비포선셋’의 남녀 주인공이 다시 재회하는 장소가 그 곳이었기에 나도 한 번쯤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보고싶은 마음에서였다. 누군가를 기다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기다린 것은 그저 앞으로 근 한 달간의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그리고 시작은 의미가있다. 그리고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곳을 찾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바로보일 줄 알았던 내 예상과는 달리 잘 눈에 띄지 않았고 두 어 번 같은 길을 왔다가 갔다가 한 끝에 겨우 발견했다. 작은 곳이었고 입구에는 사람들이 몰려서 너도 나도 사진을 찍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나도 물론 이곳에 들렀다 갔다는 기록을 남기고 싶어 앞에서 사진을 찍고 또 지나가는한국인에게까지 부탁했지만 말이다. 사진은 참으로 오래 남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물질적으로는 오래 보관될 수 있지만 그 여운만큼은 그렇게 깊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진을 보면 그 순간을 떠올리기는 쉽다. 나도 그래서 사진을 그렇게찍었는가 보다.

서점을 들어갔을 때 훅 들어온 것은 다름 아닌 책의 냄새였다. 오래된 서점이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우리나라와는 달리 갱지를 주로 사용하는 외국 서적들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하게모르겠다.

그저 ‘꿉꿉한 냄새’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그 책들의 구수한 냄새가 꽤 인상적이었다.

한참을그곳에 있었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괜히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좁은 계단도두 어 번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서점 안에서 서성였다. 이상하리만치마음이 편안했다. 낯선 곳이고 처음 온 곳이므로 내 성격에 지독할 정도로 불안해야 정상이었지만 마음깊은 곳에서 편안함이 느껴졌다. 앞으로 나아갈 프랑스 여행 그리고 이후 스페인과 이탈리아 여행의 시작을이곳에서 하길 참으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때는 일주일에 무려 세 권 이상 책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한가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책을 읽을 때면 마음이 조금 따듯해지는걸 느껴서였다. 특별히 좋아하는 책의 장르는 없었다. 그때에는 닥치는 대로 읽었다. 기준이 있다면 조금 우스운 기준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손때가 타지 않은새 책이 좋았다. 예전엔 그랬다. 그 때는 그러했다. 남의 손때가 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이 빌려가는 도서관임에도 불구하고마치 새것처럼 보이는 그런 책. 앞뒤가 맞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내가 꽤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의 꿉꿉한 냄새가,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있어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월에 닳아버린 그런 책의 냄새가 좋아진 것이었다. 불과 몇 년 전이지만 나는 변해있었다. 변한 내가 싫지는 않았다. 아닌 척 살아왔지만 꽤나 인간적이고 따뜻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아 좋았다.

그 날 저녁에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취해 있는 샹젤리제 거리를 갔다. 작년 한국에서의 크리스마스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임에도불구하고 나는 그 날을 어떻게 보냈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유난히 작년은 이렇다 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없이 지나갔고 거리에서의 캐롤 또한 자주 듣지 못했던 걸로만 기억했다. 내 경우는 더 했다.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사람도 없었을 뿐더러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은 생각도 없이 술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던것 같다. 12시간을 날아온 이 곳은 달랐다. 화려하지만따뜻했다. 거리는 여전히 크리스마스 장식과 불빛으로 반짝였고 저 멀리 보이는 대관람차 역시 아름답게빛을 발하고 있었다. 샹젤리제 거리에서 벌어진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다 찬 겨울 바람에 언 몸을 녹이기위해 사 먹은 뱅쇼의 맛을 기억한다. 종이컵이 아닌 버리기 꽤 아까웠던 빠알간 플라스틱 컵에 가득 담긴뱅쇼는 너무 뜨거워 한참을 호호 불었고 마침내 마신 한 모금은 온몸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알코올을 날려과일을 오랫동안 끓인 차나 다름없는 뱅쇼는 실제로 프랑스 사람들이 감기약으로 종종 마시는 것이라고 했다. 한잔으로 무려 다섯 명이나 나눠 마신 뱅쇼였기에 나는 함께 걷던 샹젤리제 거리의 크리스마스 마켓이 더욱 따듯하게 다가왔는가 보다. 한국에서는 만끽할 수 없던 그 분위기를, 나는 해가 지나고 머나먼바다 건너 타국에서나마 오롯이 즐길 수 있었다.


2017년 1월 2일, 횡단보도를 건너다 문득...
2017년 1월 2일, 수많은 제시와 셀린을 마주하는 곳.

잊으려고 애써 노력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일을 잊기 위해서 떠난 여행이었지만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나는 그곳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그래서, 잊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이 아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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