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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pringcome rainfall Apr 21. 2019

나의 아름다운 이웃

화곡동에 산 지 14년 정도 됐다. 이 동네를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단지 이사가 귀찮아서 눌러살다 보니 그렇게 됐다. 평생 깨끗한 아파트에서만 산 분이 처음 와보고 ‘이렇게 지저분한 동네는 처음이야’라고 말한 곳, 크리스마스나 발렌타인 데이에 누구 만나기 부끄러운 곳, 이런 후줄근한 동네에 2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의 황금 같은 청춘을 바치고 말았다.
너무 오래 살다보니 살갑지 않은 성격의 차가운 도시인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얼굴과 목소리가 다 팔린 듯 하다. 폐지 줍는 할머니와 눈인사를 하고 배달을 시키면 목소리만으로 나인 걸 안다. 이런 상황이 싫다. 하지만 14년을 살면 싫어도 어쩔 수 없게 된다.
여기저기 약한 몸이라 동네 병원에 자주 가는데 이 병원들 역시 뭐랄까, 분명 서울인데도 시골 같다. 일단 구내염 때문에 자주 들르는 이비인후과는 빌딩에 입주해있지 않고 덩그러니 서있는 단독 건물로 2층은 살림집이다. 평균연령 45세의 간호사가 심드렁하게 접수를 하면 일반적인 은퇴 연령을 한참 넘긴 의사가 심드렁하게 진료를 한다. 정형외과도 산부인과도 내과도  ‘평균연령 45세’의 의료진과 ‘심드렁’의 분위기는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한 동네에서 환자를 봐 온 내공이 느껴진다. 나이든 직장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이든 직장인을 볼 때 느껴지는 어떤 안도감은 덤이다. 젊은 동료들 틈에 끼어 불안해하다 쉰을 넘긴 나이에도 접수를 보는 중년 직장여성들을 보면 괜히 안심이 된다. 다들 열심히 일하고 있다, 나도 계속할 수 있겠다는 이상한 안도감이다. 사무실에서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은 (클라이언트를 제외하고 순수한 우리 회사 사람 중엔) 한 명뿐이다. 어쩔 땐 그분 뒤꼭지만 봐도 반갑고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어떻게 그 나이까지 버텼어요, 의 동질감을 동네 병원에서 느낀다.
늘 이용하는 약국의 중년 약사는 약만 건네지 않는다. 스테로이드를 처방받아 가져오면 장기복용하면 안 되는 이유를 말해주고 남용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멀미약이 왜 필요한지 묻고 여행지에서 쓸 거면 유리병에 든 물약 대신 휴대가 편한 알약이 낫겠다며 바꿔준다. 약국에 갈 때마다 진정으로 유능한 직업인의 힘을 느낀다. 참새 방앗간처럼 수백번 배달시켜 먹은 한식분식 짱구와 중국집 명궁 역시 좋아한다.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여자 둘만 사는 허름한 집이라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음식을 가져올 때마다 늘 정중하게 인사하고“맛있게 드십시오”를 잊지 않는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지키는 것이야말로 직업인의 제 1 원칙임을 동네 식당으로부터 상기한다.
오래 다니고 있는 장소로 요가원을 빼놓을 수 없다. 형편없는 요가 실력을 보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일단 5년 넘게 요가원에 돈을 내고 있다. 제법 열심히 다니던 때는 까마득하고 이젠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내밀면 자주 가는 거다. 요가 선생님이“아이고 이게 누구시죠”라고 할 때마다 ‘나를 말하는 건 아니겠지’ 먼 곳을 보지만 물론 내게 하는 얘기다. “얼굴 잊어버리겠어요.” “아하하 예.” “왜 이렇게 안 와요, 좀 오세요, 안 오니까 더 못하시잖아요, 예전엔 근력도 꽤 있으셨는데.” “아하하 나이가 들어서.” “나이가 들어서 근력이 떨어진 게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참을 수 있었던 걸 참지 못하게 되신 거겠죠.” “…” 늘 진실된(무서운) 지적을 듣곤 한다. 늘 비실거리면서도 요가를 부지런히 하지 않는 내가 너무나 안타까운 원장님은 급기야 당근을 내민다. “일주일 더 넣어서 결제해드렸어요, 원래 이렇게 안 해드리는데, 너무 안 오셔서요.” “아하하 감사합니다..” “몸 약해지니까 꼭 오셔야 해요, 꼭 일주일 더 오세요.” 추리닝 입은 아줌마들이 다니는 값싼 요가원이지만, 나의 나태함과 연약함을 이렇게 걱정해주는 곳이 어디 있을까. 내겐 최고의 요가원이다.
이렇게 썼다고 이 동네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는 근사한 동네로 이사가서 북유럽풍 집에서 세련되게 살 거다. 어쨌든 나쁘지만은 않다. 차가운 도시 속에서 작은 온기를 느끼며, 14년째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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