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잎들이 춤추고, 머리카락이 얼굴을 스치고, 옷깃이 펄럭일 때,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무언가 신비로운 존재가 살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바람의 정령이 은근 슬쩍 지나간 것이 아닐까, 수천 년 전 우리 조상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그 경외감을 신의 숨결이라고 불렀고, 나는 공기의 대류라고 배웠을 뿐이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이유를 찾는 동물'이다. 무엇 하나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모든 현상 뒤에 숨은 원인을 파헤치려 한다. 이 습성은 우리를 다른 동물들과 구별 짓는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사자는 굶주릴 때 사냥을 하지만, 왜 굶주림을 느끼는지 묻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우리는 설명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이런 '설명 욕구'야말로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핵심 능력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신들, 영혼, 내세. 이 모든 것들은 실재하지 않지만, 거대한 집단을 결속시키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통된 이야기가 수만 명을 하나로 묶어준 것이다.고대 그리스인들이 헬리오스의 불마차를 상상했을 때, 그들은 단순히 무지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에 충실했던 것이다. 태양이 매일 뜨고 지는 현상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고, 그 이유를 찾아내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신화적 설명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농업혁명 이후 잉여가 생겨나면서, 일부 인간들은 오로지 '이유 찾기'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철학자, 신관, 점성술사들이 등장했고, 그들은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한 나름의 설명을 제시했다. 이때의 설명들은 대부분 신화적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설명 자체가 아니라 설명하려는 시도였다. 인간은 이미 '왜?'라는 질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과학은 이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어느 순간부터 인간은 관찰과 실험을 통해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이 천체의 움직임을 관측했고, 뉴턴의 수학이 그 움직임을 공식으로 담아냈으며, 다윈의 진화론이 생명의 기원을 설명했다. 신화적 설명이 과학적 설명으로 대체되었지만, 근본적인 동기는 여전히 같았다. 인간은 계속해서 '이유'를 찾고 싶어했다.
현재 우리는 역사상 가장 많은 '이유'를 알고 있는 세대다. 구글에 질문을 입력하면 수천 가지 답이 쏟아지고, AI는 복잡한 현상도 순식간에 설명해준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시대일수록 잘못된 설명에 현혹되기 쉽다.
복잡한 경제 위기를 특정 집단의 음모로 설명하려 하거나, 코로나를 정치적 계략이나, 빌게이츠 재단의 음모로 해석하려는 시도들이 그 예다.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오직 노력으로만 설명하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는 고대인들이 천둥을 제우스의 분노로 설명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복잡한 현상을 단순한 원인으로 환원하려는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모른다'는 대답을 이토록 힘들어할까? 아마도 그것은 통제에 대한 욕망 때문일 것이다. 이유를 안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는 뜻이고, 예측할 수 있다면 준비할 수 있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성급한 결론을 재촉한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읽을 때, 우리는 복잡한 사건들에 대한 간단명료한 설명을 갈구한다. 그 설명이 옳든 그르든 상관없이.
하지만 때로는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더 현명할 수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답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이다. "이것의 원인은 무엇인가?"보다는 "이 설명이 과연 타당한가?"를 묻는 것이 중요하다. 성급한 결론보다는 불확실성을 견디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현대인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일지 모른다.
인간이 이유를 찾으려는 욕구 자체는 멈출 수도, 멈춰서도 안 된다. 그것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소중한 특성이다. 문제는 어떤 이유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있다. 헬리오스의 불마차에서 지구의 자전으로, 신의 뜻에서 자연의 법칙으로 진화해온 것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더 나은 설명을 찾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답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뒤뜰에서 바람을 느꼈던 그 어린 시절의 경외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바람의 메커니즘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 그것이 바로 '이유를 찾는 동물'로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균형이다. 인간은 앞으로도 계속 질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들이 더 현명해질수록, 우리가 찾는 답들도 더 나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