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용의 시대

by 거의모든것의리뷰

"그림을 배울 때는 거장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됐다. 남의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창의성은 어디 갔고, 독창성은 어디 갔나? 하지만 몇 달 후 깨달았다. 모네의 수련을 따라 그리면서 붓터치를 배우고, 피카소의 스케치를 모사하면서 형태 감각을 익혔다. 베끼는 과정에서 거장들의 기법들을 배우게 된다. 취미로 시작할때도 그렇겠지만 사실 모든 예술가나 장인들은 그렇게 다른 사람의 것을 배우면서 시작한다.


복제와 모방에 대한 우리의 시선은 복잡하다. 저작권과 초상권의 관점에서 보면 분명 문제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학습과 성장의 관점에서 보면 필수적인 과정이기도 하다. 친구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위대한 사람이 되거나 엄청난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게 아니라 적당한 능력만 있으면 된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가 안갔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현실적이면서도 지혜로운 말이었다.


우리는 천재에 대한 환상이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번뜩 떠올리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하지만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아인슈타인도 뉴턴의 이론을 기반으로 상대성이론을 만들었고, 스티브 잡스도 기존 기술들을 조합해서 아이폰을 만들었다.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한 게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하고 응용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들도 대부분 기존 이야기를 각색한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도 원래 이탈리아 민담이었고, 햄릿도 덴마크 전설에서 가져온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셰익스피어를 표절작가라고 부르지 않는다. 기존 소재를 어떻게 응용했는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실 대부분의 혁신은 응용에서 나온다. 기존에 있던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하거나, 다른 분야에 적용하거나, 조금씩 개선하는 것. 우버는 택시라는 기존 서비스에 스마트폰 앱을 결합한 것이다. 넷플릭스는 영화 대여 서비스에 인터넷 스트리밍을 접목한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발명은 아니지만, 기존 것들의 창의적 응용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다.


일상에서도 마찬가지다. 요리를 할 때도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하다가 조금씩 변형을 가한다. 라면을 끓일 때도 레시피대로 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 계란을 넣어보고 대파도 넣어본다. 다진마늘과 대파, 쌈장도 넣으면서 유튜브들과 방송을 참고하면서 나만의 요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특히 요즘 같은 AI 시대에는 응용 능력이 더욱 중요해졌다. ChatGPT나 제미나이 같은 도구들이 나오면서 "창작"의 정의 자체가 바뀌고 있다. 이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다 만드는 능력보다는, 이런 도구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AI가 써준 글을 어떻게 편집할 것인가, AI가 그린 그림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AI가 만든 코드를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


예를 들어, 소설을 쓸 때 AI에게 초안을 작성해달라고 한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캐릭터를 다듬고 플롯을 수정하는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창조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다. 중요한 건 AI를 단순히 대체재로 보는 게 아니라 협업 파트너로 보는 것이다. AI가 잘하는 것과 인간이 잘하는 것을 조합해서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친구가 말한 "적당한 능력"이라는 표현이 여러 분야의 기본기를 갖추고, 그것들을 조합하고 응용하는 능력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 삶 자체가 응용의 연속이다. 부모님께 배운 것, 학교에서 배운 것, 책에서 읽은 것, 친구들에게 들은 것들을 조합해서 나만의 삶을 만들어간다. 완전히 독창적인 삶은 없다. 모든 사람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받고, 그것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응용해서 살아간다.


중요한 건 이런 응용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응용을 위해 계속 배우고 관찰하는 것이다.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서로 다른 것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 노력하는 것. 그리고 AI 같은 새로운 도구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 도구는 도구일 뿐이다. 그 도구를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진짜 실력이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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