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능력주의

일부

by 거의모든것의리뷰

3년 차의 질문


회의가 끝나고 팀장이 말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민수 대리가 맡아줘. 중요한 건이라"

나는 3년 차다. 민수는 2년 차다.


복도로 나오며 생각했다. 내가 능력이 없나? 작년에 나는 세 개의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민수는 두 개를 했고, 그중 하나는 내가 뒤에서 수습했다. 그런데 왜 민수인가? 답은 간단했다. 민수의 프로젝트는 임원 보고가 있었다. 내 프로젝트는 없었다. 민수는 보고서를 화려하게 쓴다. 나는 실무를 꼼꼼하게 한다. 회사는 보고서를 본다. 실무는 보이지 않는다.


능력이란?

회사가 말하는 능력은 '보이는 능력'이다. 프레젠테이션에서 유창하게 말하는 것, 임원 앞에서 자신감 있게 대답하는 것, 깔끔한 보고서를 빠르게 작성하는 것. 이런 것들이 능력으로 측정된다. 보이지 않는 능력은 능력이 아니다.

위기 때 침착하게 대응하는 것, 신입이 실수했을 때 조용히 수습하는 것, 팀원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는 것, 6개월 뒤를 내다보고 미리 준비하는 것. 이런 것들은 평가표에 없다.

더 아이러니한 건, 보이는 능력조차 순전히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민수가 프레젠테이션을 잘하는 건 노력 때문일까?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민수는 대학 시절 영어 토론 동아리 회장이었다. 그 경험이 그를 능숙한 발표자로 만들었다. 그런데 민수가 그 동아리에 들어간 건 우연이었다. 신입생 때 선배가 권유해서 따라갔을 뿐이다.


최 부장님은 영어를 잘하신다.

그는 초등학교 3년을 미국에서 살았다. 부모님의 해외 발령 덕분이다. 우리는 각자의 운을 능력이라고 부른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는 운, 좋은 선배를 만나는 운, 좋은 부모를 만나는 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기회를 만나는 운. 이런 것들이 쌓여서 지금의 '능력'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걸 잊는다. 민수는 자신이 발표를 잘하는 게 노력의 결과라고 믿고 부장님은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생각한다.


정수기 앞에서 선배가 한숨을 쉰다.

"나보다 일 못하는 애가 승진했어."

복도에서 후배가 투덜댄다.

"내가 다 준비한 기획안을 다른 팀이 가져갔어."

회식 자리에서 동기가 푸념한다.

"3년 동안 야근하며 회사 키웠는데, 신입이 나보다 연봉 더 받아."

이 억울함은 어디서 오는가?


능력주의라는 약속 때문이다. "능력 있으면 인정받는다." "노력하면 보상받는다." "공정하게 평가한다." 우리는 이 말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회사는 능력에 따라 평가한다고 말하지만, 보이는 것만 평가한다. 보이려면 운이 필요하다. 좋은 프로젝트를 배정받는 운, 임원 보고 기회를 얻는 운, 실수했을 때 덮어줄 사람을 만나는 운.


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말했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오만을, 패자에게 굴욕을 준다."

승진한 사람은 생각한다. '내가 더 뛰어나니까.' 승진하지 못한 사람은 자책한다. '내가 부족하니까.' 둘 다 반만 맞는다. 승자는 운도 좋았고, 패자는 운이 나빴다. 하지만 우리는 그걸 인정하지 않는다.


"그럼 노력은 의미는 없나?" "운이 나쁘면 평생 손해만 보라는 거야?" "이 불공정한 시스템을 그냥 받아들이라고?"


아니다. 이게 삶일 뿐이다.

삶은 원래 공정하지 않다. 똑같이 노력해도 결과는 다르다. 능력이 있어도 기회를 못 만날 수 있고, 능력이 없어도 기회를 만날 수 있다. 이게 현실이다. 중요한 건, 이 현실을 알고도 어떻게 살 것인가다.


승진 누락


박 대리는 5년 차가 되어서야 과장이 되었다.

동기들은 4년 차에 다 됐다. 1년 늦었다. 승진 발표를 보고 누군가 축하한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박 과장은 담담하게 웃었다.


휴게실에서 후배가 물었다.

"선배님, 억울하지 않으셨어요? 저 같으면 진작 때려치웠을 것 같은데."

박 과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

"억울하지. 당연히 억울해. 근데 그게 뭐 어때? 세상이 원래 그런 거잖아."

"그래도..."

"있잖아. 나도 처음엔 화났어. 1년 차 때는 '내가 뭘 못했나' 자책했고, 2년 차 때는 '회사가 불공정하다' 분노했어. 3년 차 때는 그냥 체념했지."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그냥... 받아들였어. 회사는 완벽하게 공정할 수 없어. 어디 가도 마찬가지야. 중요한 건 내가 어떻게 일하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야."

후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박 과장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승진이 늦어진다고 내가 하는 일의 가치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내가 제대로 일했으면, 그걸로 된 거지. 회사가 그걸 못 알아보는 건 회사 문제야. 내 문제가 아니라고."


태도


같은 상황, 다른 태도.

정수기 앞의 선배는 2년째 승진에 실패하고 매일 불평한다.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동료를 질투하고, 회사를 원망한다. 그의 하루는 불만으로 가득하다. 박 과장은 3년째 승진에 실패하고도 평소처럼 일했다. 억울했지만 팀 회의에서 여전히 의견을 냈다. 불만스러웠지만 후배의 실수를 커버해 줬다. 화가 났지만 웃으며 하루를 보냈다.

무엇이 다른가?

시스템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정수기 선배는 시스템이 공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불공정함이 견딜 수 없었다. 박 과장은 시스템이 불완전하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불공정함이 예상 범위였다. 정수기 선배는 승진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박 과장은 승진과 자신의 가치를 분리했다. 정수기 선배는 3년을 원망하며 보냈다. 박 과장은 3년을 일하며 보냈다.


능력주의라는 거짓말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겸손을 빼앗는다는 것이다.

성공한 사람은 생각한다. "내 능력 덕분이야." 실패한 사람은 자책한다. "내 능력이 부족해." 둘 다 오만하다. 성공은 온전히 자기 것으로 여기고, 실패는 온전히 자기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능력주의가 거짓말이라는 걸 안다면?

성공했을 때 생각할 수 있다. "나도 노력했지만, 운도 좋았어." 그러면 겸손해진다.

실패했을 때 생각할 수 있다. "내 잘못도 있지만, 타이밍도 안 맞았어." 그러면 자책이 줄어든다.

동료가 승진했을 때 생각할 수 있다. "저 사람이 나보다 나은 인간이어서가 아니야. 기회가 좋았던 거야." 그러면 질투가 줄어든다. 후배가 실수했을 때 생각할 수 있다. "저 친구가 무능해서가 아니야. 아직 배우는 중이야." 그러면 관대해진다.


능력주의의 환상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서로에게 더 친절해질 수 있다. 그게 어쩌면, 이 불완전한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이게 이 불완전한 시스템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의 시선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 내가 제대로 일했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일을 하고 회사를 다니는 것이지,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회사를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의

능력주의 (能力主義, Meritocracy)
명사

능력에 따라 보상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보이는 능력만 측정하는 불완전한 시스템

운칠기삼(運七技三)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는 현대의 신화

승자에게는 오만을, 패자에게는 굴욕을 선물하는 잔인한 게임

거짓말이지만, 그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묻는 실존의 문제


관련 격언

"운칠기삼" - 성공의 70%는 운, 30%는 실력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 불공정해도 살 길은 있다

"사람을 탓하지 말고, 운을 탓하라" - 능력이 아니라 운의 문제다


교훈: 능력주의는 불공정하다. 하지만 그 불공정함을 받아들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 그게 성숙이고,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관련 항목: 승진, 평가, 공정성, 운, 겸손, 성숙, 태도, 박 과장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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