ㄷ-대리

어중간한 나

by 거의모든것의리뷰

승진 발표일


대리를 달았다.

입사 이후 사원이라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자리에서 3년의 시간이 지나 대리로 이어지는 진급의 사다리를 처음으로 타고 올라간다. 주변에서의 축하가 있었다. 대부분의 동기들은 모두 같이 대리가 되었고 팀 내에서도 "이제 대리네~" 하는 얘기를 들으면 쑥스러운 듯 "감사합니다"라는 가벼운 목례로 답한다.

아직은 얼떨떨하지만 괜히 기분이 좋다.

명함 한편, 이름보다 앞선 자리에 적혀 있던 '사원'이라는 글자가 바뀌었다. '대리'

이제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선배가 하는 저 정도 일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는 마음이 올라올 만한 시점에 마침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는구나 싶다!

월급도 아주 조금이지만, 올랐다. 월급만 오른 것이 아니다. 덩달아 어깨도 1.5cm, 남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만큼만 올라간다. 나도 이제 무언가를 하는 시기가 온 건가! 신나는 마음이 앞선다. 이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궁금하다.


D+30: 들뜬 마음의 착륙


들뜬 마음으로부터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들뜬 마음과 어깨는 다시 원래 자리를 되찾았다. 물론 하루 이틀 사이에 업무가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건 마치 군대에서 이병이 일병이 되었을 때의 느낌과 비슷하다. 직급은 올랐는데 하는 일은 별 차이가 없다.

그 답답함에 인터넷에 '대리의 역할'까지 검색해 봤을 때는 분명, '실무자와 중간 관리자의 다리 역할'이라고 적혀있었는데, 이게 다리 역할이 맞는 건지, 옛날 중세 시대에 귀족들이 마차에서 내릴 때 하인이 계단을 만들어주던 것처럼 디딤발을 딛는 정도인 건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게다가 사원의 티를 벗었다고 생각했는지 선배들이 업무를 하나둘 인계해 주는데, 업무의 중요도 측면에서 하던 일들이 병렬적으로만 늘어난 느낌이다.


사원 때: 보고서 작성, 자료 정리, 회의록 작성

대리가 된 후: 보고서 작성, 자료 정리, 회의록 작성, + 프로젝트 보조, + 신입 업무 확인

이게 승진이 맞나?


D+90: 첫 번째 프로젝트


계절이 바뀌고 어느 날, 프로젝트 하나를 맡게 되었다.

"이번 고객사 제안, 네가 한번 담당해 봐." 과장님이 말한다.

"네? 제가요?"

"응. 작은 건데, 할 수 있을 거야. 선배들이 했던 거 참고하면 돼."

작은 프로젝트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선배들이 한 것과 비슷하게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맡기긴 했지만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드디어 승진을 한 보람이 있다!


프로젝트 시작


막상 일을 시작하니 생각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고객사에서 메일이 왔다.

"제안 일정이 다음 주 금요일로 당겨졌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당황스럽다. 원래는 2주 뒤였는데, 1주일로 줄었다. 과장에게 보고해야 한다.

"과장님, 일정이 앞당겨졌는데요..."

"그래? 그럼 빨리 준비해야지. 괜찮아?"

"네... 해보겠습니다."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머릿속은 하얗다. 뭐부터 해야 하지?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이전에 선배들이 만든 게 있으니, 잘 지워가면서 하면 되겠지? 제안서를 작성하려고 지난번 선배 파일을 열었다. 100페이지. 생각보다 많다. 하지만 복사해서 수정하면 되겠지. 복사하고 회사명을 바꾸고, 날짜를 바꾸고, 내용을 수정하기 시작한다.

15페이지쯤 수정했을 때, 의문이 든다. 이 내용이 이번 고객사에게 맞는 건가? 지난번 고객사는 제조업이었다. 이번 고객사는 유통업이다. 업종이 다르다. 그냥 복사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제안서를 새로 써야 하나? 과장님께 여쭈어 봐야 하나? 머리가 지끈거린다.


팀장님이 지나가시다가 묻는다.

"제안 준비 어때?"

"네, 진행 중입니다."

"고객사 담당자랑은 소통 잘 되고 있어?"

아. 고객사 담당자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다. 선배들은 항상 전화하고 메일 주고받던데, 나는 메일 한 통만 받고 아무 연락도 안 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신 것 같다.

"전화 한번 해봐"


고객사 담당자에게 전화를 건다. 심호흡을 한다.

"안녕하세요, 일성전자 박대리입니다."

"아, 네. 박대리님."

"제안 건으로 연락드렸는데요, 혹시 궁금하신 부분이나 중점적으로 봐주셨으면 하는 부분 있으신가요?"

"아, 그거요? 일단 가격이 제일 중요하고요. 그리고 납기 일정이요. 저희가 다음 달까지 꼭 도입해야 해서요."

"아... 다음 달이요?"

"네. 그거 가능하죠?"

가능한지 모르겠다. 손에 땀이 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패닉 상태에 빠졌다. 개발팀 일정을 확인 문의하니 두 달이 걸린다고 한다. 어떡하지? 어쩔 수 없다. 과장님께 중간보고를 하고 한번 리프레시가 필요하다. 과장님이 돌아오셨다.

"개발팀이랑 조율했어. 핵심 기능만 다음 달에 오픈하고, 나머지는 단계적으로 추가하는 걸로."

아... 방법이 있었구나.


나는 '전부 다음 달' 아니면 '전부 두 달'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나눌 수 있었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단계를 나누고. 이런 걸 선배들은 어떻게 아는 거지?


제안서를 마무리하면서 깨닫는다.

선배들이 하는 일이 쉬워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이미 다 겪어봤기 때문이다. 고객사와의 협의, 개발팀과의 조율, 일정과 품질의 균형, 예상치 못한 변수 대응. 이 모든 걸 선배들은 매끄럽게 해냈다. 나한테는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았던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나는 옆에서 보기만 했다. 직접 하지 않았다. 보기와 하기는 다르다. 둘째, 선배들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미리 처리했다. 문제가 생기지 않으니, 나는 문제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제안서 최종본을 과장님께 드린다.

"수고했어. 고생 많았지?"

"네...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처음엔 다 그래. 다음엔 좀 나아질 거야."

다음엔. 다음에도 이렇게 막막할까? 아니면 조금은 나아질까?


결국 끝났다. 모든 것이 꽤 성공적으로.


대리라는 자리


"첫 프로젝트 어땠어?"

"힘들었습니다."

"그렇지? 나도 처음엔 그랬어."

"과장님은 어떻게 이렇게 매끄럽게 하세요?"

"매끄러워 보이지? 근데 나도 속은 복잡해. 다만 경험이 쌓이면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예상하게 되더라고."


예상.


그게 차이였다. 나는 문제가 생기면 당황한다. 선배들은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비한다.

"대리가 뭔지 알겠어?"

"... 사원보다 일이 많은 거요?"

"하하, 틀린 말은 아닌데. 대리는 말이야,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 자리야."


스스로 생각하는 것.

사원 때는 시키는 일을 했다. 보고서를 쓰라면 썼고, 자료를 정리하라면 정리했다. 생각은 선배들이 해줬다.

하지만 대리는 다르다. 무엇이 필요한지, 누구와 협의해야 하는지, 어떤 문제가 생길지, 어떻게 해결할지.

이 모든 걸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과장님은 지금 세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 중이다. 차장님은 다섯 개를. 부장님은 열 개를. 나는 하나 하는데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그들은 어떻게 여러 개를 동시에 하는 걸까?


복도에서 차장님을 본다.

"차장님, 프로젝트 여러 개 하시는 거 어떻게 하세요?"

"응? 그냥 하다 보면 돼. 처음엔 다 힘들어."

"저는 하나도 이렇게 힘든데..."

"지금은 그래. 근데 1년 뒤면 두 개 할 수 있어. 2년 뒤면 세 개. 그렇게 늘어나."

시간이 필요하구나.


대리는 어중간하다.


신입은 아닌데, 그렇다고 관리자도 아니다.
일은 늘었는데, 책임은 커졌는데, 인정은 적다.
스스로 생각해야 하는데,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


사원에서 과장으로 가는 다리.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가는 징검다리. 누군가는 이 다리에서 오래 머문다. 누군가는 빨리 건너간다. 누군가는 이 다리가 편해서 여기에 눌러앉는다.


나는 어떻게 될까? 아직 모르겠다.

어쩌면 실수해도 되는, 마지막 자리일지도 모른다. 아직, 대리라서

그래서 지금, 최대한 많이 해봐야 한다. 실수하고,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승진은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정의


대리 (Daeri/Assistant Manager)
명사

사원에서 과장으로 가는 징검다리. 실무자에서 관리자로 가는 다리.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자리. 시키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는 자리.

어중간한 자리. 신입도 아니고 관리자도 아닌, 일은 늘고 권한은 없는 자리.

실수해도 되는 마지막 자리. 배우고 성장하는 시기.


대리의 특징:

첫 프로젝트를 맡는다

생각보다 생각할 게 많다는 걸 깨닫는다

선배들이 대단하다는 걸 느낀다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조금씩 성장한다


대리가 배우는 것들:

협의하는 법 (고객사, 개발팀, 유관부서)

조율하는 법 (일정, 품질, 비용)

예상하는 법 (어떤 문제가 생길지)

대응하는 법 (예상치 못한 변수)

포기하지 않는 법 (막막해도 계속하는 것)


관련 항목: 사원, 승진, 과장, 프로젝트, 책임, 성장, 실수, 경험, 선배, 시간,?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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