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에 질린 개인은 자신을 묶어 줄 누군가 또는 무언가를 찾게 된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스스로 개별적 자아로 존립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자유로 인한 부담 즉 자아를 제거함으로써 불안감을 떨치고 다시 안정감을 느끼려고 미친듯이 노력하게 된다. - 프롬
자유를 찾아 헤메는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종교적, 문화적인 구속복을 점점 벗어던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체감으로 느꼈을때는 두발자유화, 교복의 자유화 등에서 시작된 것들이 낙태와 동생애 등 강력하게 규제되던 것들에까지 목소리를 올리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이름아래 요구되고 있다. 가끔은 너무나도 자유로워 자유와 방임 그 사이를 드나드는 것처럼 보여 제동이 걸리기도 하지만 브레이크가 있을 뿐 운전대는 없어보인다. 무한히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인다.
기술의 발전은 그런 현상을 가속화했다. 시간적, 공간적 자유를 주었다. 문화적 밈은 순식간에 지구 한바퀴를 돌기도 한다. 틱톡에서 유행하는, 릴스에서 유행하는 것들이 이제는 국가와 지역에 상관없이 퍼지게 되었다. 각 나라의 음식 음악 등의 문화도 전세계 어디에서도 퍼지게 되었다. 하나의 계기만 있다면 전세계 사람들에게 순식간에 퍼지게 된다. 우리나라의 오징어게임, bts 와 케데헌을 필두로 한 k-pop 등을 이제는 어디서나 들을 수 있게 되었고 꽤 오랜 시간동안 꽤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을 것이 분명하다.
설적이게도 이 자유로운 시대에 우리는 더 절실하게 '우리'를 찾는다.
다원주의는 다양한 동네를 만들어냈는데, 기술의 발달에 따라 누구나 그 동네를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연히 들른 누군가가 될 수도 있고 의도적으로 찾아온 방문자 모두에게 열려있는 그곳 커뮤니티. 하지만 환영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와 같은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의 규칙을 따라야 한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은, 아무리 정중하게 다가와도 배척당한다. 물리적으로는 가장 열린 공간이 심리적으로는 가장 닫힌 공간이 되었다.
온라인 특정 당을 지지하는 커뮤니티에서 조금만 다른 의견을 내면 '내부의 적'이 된다. 투자 커뮤니티에서 손실을 인정하면 조롱받는다. 육아 커뮤니티에서 다른 방식을 택하면 비난받는다. 각자의 커뮤니티는 각자의 정의를 가지고 있고, 그 정의에서 벗어나는 순간 추방된다.
이제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어떤 커뮤니티에 속할지, 어떤 가치를 믿을지, 어떤 정체성을 가질지.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스스로 선택한 소속이 과거의 강제된 소속보다 더 강력한 구속이 되어버렸다. 왜일까? 어쩌면 내가 선택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른 커뮤니티, 내가 동의한 가치, 내가 택한 정체성. 이것들을 의심하는 것은 곧 나의 판단을 의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더 열렬히 옹호하고, 더 강하게 방어하며, 더 쉽게 타인을 배척한다.
직장도 마찬가지다. "요즘 젊은 세대는 회사에 충성심이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틀린 말이다. 충성심이 없는 게 아니라 충성의 대상이 바뀌었다. 회사라는 조직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팀, 신뢰하는 리더, 공감하는 가치. 좋은 리더 밑에서는 밤을 새워도 아깝지 않지만, 그 리더가 떠나면 함께 떠난다.
프롬은 맞았다. 자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개인은 다시 구속을 찾는다. 너무 많은 자유는 사람을 길 잃은 방랑자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나아갈 길을 알려줄 북극성을 찾는다. 저 넓은 우주에서 찾은 단 하나의 별은 때로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금방 실증내고 또 다른 별을 찾아 떠난다.
기술의 발달은 그 어떤 별도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그 중력을 느끼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그 선택을 번복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기술이 우리에게 준 최후의 자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