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셋

by 거의모든것의리뷰

의도하지는 않았던 디지털 디톡스에 이어 한 가지 더 문제가 찾아왔다. 리셋.


핸드폰에 기록되어 있던 노트, 전화번호, 사진 등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사설업체에 가면 복구할 수 있다고 하지만 괜히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리셋을 받아들이기는 불편했다. 그중 가장 애매한 것은 전화번호였다. 핸드폰이 생긴 이래로 모든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연락처들이 사라져 버렸다. 깨끗하게. 그중 머릿속에 남아있던 연락처는 채 5명이 되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전화번호를 꽤 외우고 다녔던 것도 같은데 이제는 외우지 않는다기보다, 그 쓸모가 다했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전화번호를 외워, 공중전화에서 전화를 해야 했던 시절에서 벗어나 카카오톡에서 친구를 찾아 통화를 누르면 되는 세상으로 변해버린 뒤 전화번호를 굳이 기억해야 하는 의미가 없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카카오톡의 친구들도 사라지게 되었다. 사실, 전화번호만큼 카카오톡의 친구들도 오히려 전화번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뭐랄까, 전화번호를 모른 채 카카오톡을 아는 것은, 그렇게 친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연락은 할 수 있는 사람들 간의 관계를 의미했었다. 지금은 카카오톡보다 인스타그램 dm으로 변한 것 같지만, 적어도 나의 20살에서는 연락처와 카카오톡의 친구의 관계는 그러했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같이 사라져 버린 것은 처음부터 인간관계를 다시 설정해야 할 것 같았다.


연락처난 카카오톡의 친구들에 대한 리셋도 쉽지 않은 선택이기도 했지만 가장 커다란 상실은 사진들이었다. 적어도 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서 한 번의 수고를 더 했던 순간들을 이제는 잊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희미한 기억이었다고 하더라도 사진을 한번 보면, 사진이 힌트가 되어 연관된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는데 이제는 그런 힌트를 찾을 수 없었다. 희미한 기억이라면 희미한 기억인 채로, 희미한 흔적조차 사라졌다면 그 아련한 느낌만을 간직한 채로 실체 없는 그리움을 느끼면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가장 복구를 해야 하는지 고민을 많이 했었다.


생각해 보니 점점 커져가는 핸드폰 저장 용량의 대부분은 1년에 한 번도 보지 않을 기억들로 채워져 있었다. 어쩌면 강박적으로 모아둔 기억의 파편들이 과연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그토록 두려워해서 모든 순간을 보존하려 하는 걸까?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친구'들이 목록에 있었지만, 그들은 현재의 친구가 아니라 과거에 '친구였던' 사람들이었다.


강제 리셋은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불필요한 것들을 끌어안고 살았는지 깨닫게 해 주었다. 정말 중요한 사람들은 다른 방법으로도 찾을 수 있었고, 진짜 소중한 기억들은 사진이 없어도 생생했다. 나머지는 아마도 잊혀도 상관없는 것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리셋이 상실일까, 해방일까? 아직은 확신할 수 없다.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좋은 변화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경험을 해볼 기회는 흔하지 않다. 의도치 않은 이 실험을, 일단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보기로 했다. 결국 인생이란 예상치 못한 리셋의 연속이 아닌가. 때로는 모든 것을 잃는 것이 진짜 중요한 것을 찾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바닷물이 가져다준 이 강제적 새 출발을, 적어도 한 번은 즐겨보기로 했다.

작가의 이전글그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