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선선하게 부는 어느 날, 한강이 보이는 공원에서 그늘을 찾아 모여있는 돗자리들과 텐트가 모여있다. 구름이 있어 햇빛이 비치지 않았었는데, 구름이 걷히고 나니, 그늘을 찾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늘에 들어가자 선선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가며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늘 주위에 옹기종기 모이는 것은 지리적인 장점이 있는 곳에 마을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늘이라는 단어는 이상하다. 여름날 나무 아래 그늘은 축복이지만, "그 사람은 항상 그늘에서 산다"라고 하면 왠지 서글픈 뉘앙스가 느껴진다. 똑같은 그늘인데 말이다.
한강에서 그늘을 향해 사람들은 모여든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괜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그늘로. 그늘 아래에서 책을 읽고 대화를 한다. 가장 완벽하게 편안한 자리를 만들어준다. 하지만 다른 그늘도 있다. 높은 건물들 사이에 끼인 골목길의 그늘처럼, 하루 종일 해가 들지 않는 곳의 그늘은 축축하고 음산하다. 그곳에 있으면 왠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사람들도 그런 길보다는 양지바른 대로를 선호한다. 같은 그늘인데 이쪽은 사람을 위축시키고 우울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늘진 성격"이나 "그늘에서 사는 삶"도 후자에 가깝다. 빛나는 무대 위가 아닌 구석진 곳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곳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킬 때 쓰는 표현이다. 때로는 그것이 겸손함으로 비칠 때도 있지만 더 자주는 소외나 위축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늘이 졌다는 표현 역시 어딘가 좋지 않은 표정이나 안색을 말한다.
이 차이는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선택의 여부다. 우리가 스스로 찾아간 그늘은 자유의 공간이지만, 어쩔 수 없이 머물러야 하는 그늘은 감옥이 된다. 나무 그늘에서 느끼는 평온함과 지하도 상가에서 느끼는 답답함 사이의 거리는, 물리적 조건의 차이가 아니라 심리적 자율성의 차이에서 온다. 선택할 수 있는 그늘이냐가 관건인 것이다. 사실, 그늘뿐만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또 다른 예로 '공부'가 있다. 학생 때는 부모님의 등살에 밀려하게 되는, 공부를 자의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 하게 되면 그렇게 하기가 싫은데, 내가 해야 한다고 마음을 먹으면 나름 할만해지고 가끔은 재미있어지기까지 한다. 특히, 성인이 되어서 배우고 싶은 것들에 대해 배우는 시간은 그것이 또 다른 방식의 공부임에도 돈을 내면서까지 배우는 것을 보면 심리적 자율성이 어떤 행위에 대한 이미지를 다르게 만드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어쩌면 무엇을 해야 할 때, 스스로 찾아서 들어가는 그늘처럼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달라질는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