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나지 않아도 괜찮아
휴가 셋째날, 아침에 남편을 출근시키고 아침식사로 간단히 과일을 먹었다. 무한도전 쩐의 전쟁 편을 낄낄대며 (혹은 아련하게) 보다가 문득 티비를 꺼야 소파에 누운 내 몸을 일으킬 수 있음을 깨달았다.
뱃속의 땅콩이에게 말했다. 엄마는 이 시점에서 티비를 꺼야해!
배가 나오니 너무 타이트해서 외출할 때에는 입지 못하고 있는 면으로 된 롱원피스를 입고 야상을 툭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비가 오는 것 같아 민트색 3단 우산을 챙겼는데 정말로 비가 왔다. 마침 잘 됐어.
우산을 쓰고 걸으면 왠지 나를 보호하는 기분이라 좋다. 마치 마스크를 써서 씻지도 않은 쌩얼을 감추고선 뿌듯해지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할까. 아, 물론 오늘도 역시 세수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선건 안 비밀!
아파트 단지를 살살 걷는데 철쭉과 진달래가 꽃망울을 잔뜩 내어놓고 있었다. 동글동글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쳐다봤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꽃망울들이 하나하나 갈색 모자를 쓰고 있는게 아닌가. 이게 뭐지?
이럴수가. 내가 그간 너희들의 노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쉽게 꽃을 피우는 흔한 가로수라고 생각했었구나.
활짝 피어나지 않아도 괜찮다. 향기가 나지 않아도 괜찮다. 너희는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해내고 있었구나.
헤르만 헤세의 명작 데미안의 문구가 생각났다. 꽃을 피우기 위해 자신을 오롯이 감싸던 껍질을 밀어내고 있던 철쭉의 꽃망울 하나에도 이런 진리가 숨어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반드시 높고 먼 곳에 있는 것이 진리가 아니요,
비오는 날 산책길에서 발견한 여리고 작은 꽃망울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게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에게도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아, 엄마.
앞으로도 내가 더 깊고 아름다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길,
그리고 오늘 나와 함께 해준 뱃속의 땅콩이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수 있는 아이로 자라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