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배의 어머니, 손경호 여사는 며칠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서울에서 아들이 학업에 매진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녀에게, 홍배가 서울 농구부에 정식 선수로 활약 중이라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믿기 어려운 마음에, 그녀는 홍배가 살고 있는 시동생 집에 전화를 걸어 재차 물었다.
“서방님, 홍배는 공부는 잘하고 있는 겁니까? 운동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작은아버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솔직하게 답했다.
“홍배가 농구에 큰 재능이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께서도 그걸 인정하시고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그 말에 경호 여사의 마음은 더더욱 복잡해졌다.
‘재능이라니... 하지만 홍배 아버지의 뜻은 분명했잖아. 학업이 먼저지.’
그 시각,
홍배는 밝은 햇살이 쏟아지는 교실 창가에 앉아 있었다.
1교시 국어 수업을 마치고 책을 덮으며 한숨을 돌린 그는 곧이어 다가올 2교시 영어 시간이 더 기대되었다.
언어와 문학을 사랑하는 홍배에게 국어와 영어는 단연 최고의 시간이었다.
영어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교실은 한순간 조용해졌다.
깔끔한 정장을 입고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선생님은 특유의 미소로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교탁에 교재를 내려놓은 그는 칠판에 우아한 필기체로 “Good morning!”을 적어 내려갔다.
홍배는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의 손끝을 주시했다.
‘와, 저 필기체... 서울이라서 이런 선생님도 만나는구나.’
선생님의 필기체는 부드럽고 세련된 곡선으로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우아함을 담고 있었다.
홍배는 영어를 공부하는 재미가 무엇인지 더욱 생생히 느끼기 시작했다.
수업 중반,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간단한 문장을 따라 읽으라고 했다.
“How are you today? 따라 해 보세요.”
학생들은 한 줄씩 차례로 대답했다.
“How are you today?”
홍배의 차례가 되자,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또박또박 말했다.
“How are you today?”
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Oh, bon! 홍배, 발음이 정말 훌륭해요!”
홍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영어를 말할 때만큼은 경북 사투리도 감춰지고, 자신감이 차오르는 듯했다.
이어서 선생님은 칠판에 “bon”이라는 단어를 적고 말했다.
“‘Bon’은 불어인데, 영어에서도 가끔 사용돼요. ‘멋지다’, ‘훌륭하다’라는 뜻이죠.”
교실은 박수와 웃음으로 가득 찼다.
홍배는 멋쩍게 고개를 긁적였지만, 속으로는 기분이 무척 좋았다.
‘Bon’이라는 단어가 자신을 표현하는 특별한 칭찬처럼 느껴졌다.
수업이 끝난 뒤, 가방을 정리하던 홍배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Bon... 나중에 내 아이 태명을 이렇게 지으면 좋겠네.’
그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밝게 웃었다.
비록 농구와 학업을 병행하느라 힘든 날들이 많았지만, 이런 작고 소소한 순간들이 그에게 삶의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2교시 수업이 끝나고, 홍배는 교실 창가에 서서 햇살을 받았다.
도시의 학교에서, 그리고 자신을 인정해 주는 선생님들 사이에서 공부하며 꿈을 키워가는 자신이 조금씩 자랑스럽게 느껴졌다.
‘운동만큼 공부도 잘하면 어머니가 좀 덜 걱정하시겠지?’
홍배는 책을 품에 안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공부도 열심히, 농구도 열심히. 내가 하고 싶은 것 모두 해내자.’
그의 눈빛에는 강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한편, 영천에서 경호 여사는 이틀 밤을 지새운 끝에 결단을 내렸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었다.
“서방님, 홍배 체육 선생님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습니다.”
서울로 가는 짐을 순식간에 꾸린 경호 여사는 동네의 도움을 받아 읍내로 나갔다.
영천시 중에서도 청통면 호당리.
그 시골에서 나와 서울행 기차를 기다렸다.
이윽고, 서울행 기차에 오른 경호 여사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기차는 산을 넘어 들판을 지나며, 그녀의 마음속 기억들도 함께 지나갔다.
또래보다 공부를 잘했던 홍배의 어린 시절, 그리고 너무도 빨리 세상을 떠난 남편의 모습이 번갈아 떠올랐다. 남편은 늘 말했다.
“여보, 우리 홍배는 꼭 공부 잘 시켜서 크게 키워야 한다. 이 아이는 크게 될 거야.”
남편의 말을 떠올리며, 경호 여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 아이는 농구공을 쥐고 뛰어다니고 있다니... 과연 이게 맞는 걸까?’
기차는 6시간을 달려 서울역에 도착했다.
경호 여사는 복잡한 서울의 풍경에 잠시 압도되었지만, 곧 공중전화를 찾아 홍배가 다니는 광희중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농구부 홍배 엄마입니더. 차재억 선생님 좀 부탁드리겠습니더.”
광희중학교 체육실 복도에는 세월을 머금은 목재 책상과 벽에 걸린 농구팀 사진들로 가득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차재억 선생님이 바로 눈에 띄었다.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경호 여사를 맞이하였다.
“안녕하세요, 홍배 어머니.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경호 여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닙니더, 선생님. 우리 아는 공부하려고 서울로 보냈는데, 운동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가... 걱정돼서 왔습니더.”
차 선생님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홍배는 정말 특별한 아이입니다, 어머니. 저도 제자들 중에서 이렇게 성실하고 재능 있는 아이는 처음 봅니다.”
경호 여사는 그 말을 듣고 놀라며 물었다.
“특별하다뇨?”
“홍배는 운동만 잘하는 게 아닙니다. 국어 시간에는 시를 잘 써서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고, 영어 시간에는 발음이 좋고 흥미를 보입니다. 게다가 운동장에서도 늘 팀원들을 먼저 챙기고, 노력하는 태도가 단연 돋보입니다.”
경호 여사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물었다.
“그래도 공부해야 할 나이 아닙니까? 운동은 나중에 시켜도 되지 않겠습니까?”
차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홍배는 이미 농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누구보다 성실합니다. 제가 봤을 때는 운동과 공부를 병행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아이입니다. 홍배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잠시 더 지켜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경호 여사는 체육실에서 나와 한참을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차재억 선생님의 말씀처럼 홍배에게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남편과의 약속도, 자신의 기대는 역시 그를 공부시키는 데 있었다.
결국 경호 여사는 학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홍배를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영천의 봄날.
홍배는 오랜만에 고향으로 와서 잔뜩 신이 났다.
홍배는 농촌 들판을 뛰어다니며 친구들과 여러 놀이를 하고, 냇가에서 멱을 감았다.
그리고 곧 주말이 다가오자, 서울로 갈 준비를 했다.
이내, 어머니가 홍배의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말씀하셨다.
“홍배야, 이제 서울로 안 올라가도 된다.”
“예????”
이날로 홍배는 경북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처음엔 서울에서의 생활이 몹시 그리웠다.
매일 뛰어다니고 운동하던 일상이 비틀어지니 홍배는 미칠 것만 같았다.
몸도 근질거렸고, 서울의 은사님들 소식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함께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꿈을 키웠던 팀원들에게 미안했다.
그러나 홍배는 고향의 여유로운 일상에도 곧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래도 농구는 잊지 못했다.
밤이면 방 안에서 몰래 공을 튀기며 손끝의 감각을 익혔다.
학교에서는 수업에 열중하려 했지만,
영어 선생님의 글씨는 서울 영어 선생님의 멋진 필기체와는 달리 투박했다.
홍배는 선생님의 수업을 들을수록 속으로는 그리움을 삼켰다.
서울에서의 꿈과 추억은 그를 이끄는 힘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대를 가슴에 새기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조용히 준비해 나갔다.
‘운동도 공부도 놓치지 않을 거야.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해낼 거야.’
홍배의 눈빛은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