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나눔의 철학

by 다잘쓰는헤찌

홍배가 고향 영천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언제나처럼 어머니와 형님들의 사랑으로 가득 찬 따스한 안식처였다.

고향의 푸근함 속에서 홍배는 가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최규백 씨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남긴 모습과 가르침은 홍배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아, 지금의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빚어낸 원천이었다.


홍배네 집은 100평에 달하는 커다란 기와집 단독 주택이었다.

낮이면 따스한 햇살이 마당에 가득 내려앉고, 밤이면 별빛이 처마 끝에 걸리는 장소였다.

그러나 이 집은 단순히 크기와 풍경으로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 이유는 초록색 대문의 문턱을 넘으면 누구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사랑과 나눔이 늘 깃들어 있었다.


점심 무렵이 되면 동네의 거지들이 하나둘 홍배네 집 앞에 나타났다.


“마나님, 밥 좀 주세요.”


거지들이 간절한 목소리로 외치면, 홍배의 어머니 손경호 여사는 늘 부엌으로 향했다.

그 몸짓에는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부엌에서 갓 지은 따뜻한 밥을 한 웅큼 퍼다 깡통에 담아 건네는 일이 그녀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광경을 책을 읽고 있던 아버지 규백 씨가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걸뱅이들도 사람인데 깡통에 담아 주는 밥은 저녁에 먹도록 하고, 지금 들어와서 한 상 제대로 차려 드리시게.”


그의 말은 언제나 따뜻하고 진중했다.


경호 여사는 남편의 뜻을 따라 사랑방 안쪽 가장 따뜻한 자리에 한 상 가득 정성껏 음식을 차려냈다.

그 상에는 정갈하게 담긴 영천의 특산물인 돔배기와 각종 나물들이 올려져 있었다,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손님을 대접하듯, 깔끔하고 따뜻하게 차린 상이었다.

거지들은 매번 눈물을 글썽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거지들도 최씨 가문의 자존심을 존중했다는 것이다.


“얘들아, 최씨 마나님 집에 갈 때는 냄새나면 안 된다. 깨끗하게 박박 씻어야 한데이.”


영천 최부잣집의 초록색 문턱을 넘기 전, 거지들은 냇가에서 몸을 씻고, 자신이 가진 가장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찾아왔다.

냄새와 먼지를 털어내고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자신들도 대접받을 만한 존재임을 되새기는 듯했다.

매번 경호 여사는 남편의 뜻에 따라 그들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내주었고, 푸짐한 한 끼를 대접했다.


그런 부모의 모습을 보고 자란 홍배는 자연스레 나눔의 철학을 삶에 새겼다.


그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나눠주는 것을 좋아했다.

남에게 나눠주는 기쁨을 누구보다 먼저 깨달았다.

친구나 이웃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마음이 담긴 선물이나 돈을 건넸고, 자신이 적게 먹더라도 함께 나누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것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선행을 넘어선 가족의 전통이자 그의 삶의 중심이었다.


홍배는 집에서 일하는 머슴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

그는 머슴들에게 주는 막걸리를 직접 나르며, 가끔 그들과 함께 한 잔씩 나누기도 했다.

그런 순간마다 홍배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같이 나누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지 모릅니다.”


일을 끝내고 함께 막걸리를 마실 때면, 홍배는 나눔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느꼈다.

이렇듯 홍배의 삶 곳곳에는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나눔의 가치가 녹아 있었다.

머슴들 역시 그를 단순한 주인집 도련님이 아니라 다정한 친구로 여겼다.

홍배는 그만큼 마음이 넉넉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런 평화로운 일상도 시간이 지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홍배는 대구 시내에 있는 성광고등학교에 진학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홍배는 옷을 디자인하며 지내던 손윗 누나, 성배의 집에서 머물며 고등학생으로서 생활을 시작했다.

대구에서의 생활은 홍배에게 또 다른 도전이었다.

도시 생활의 낯섦과 고향의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교차했지만, 홍배는 특유의 성실함과 인내심으로 학교생활에 임했다.


그는 공부에 매진하며 대학 입시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그의 마음속에 깊은 고민이 자리 잡았다.

홍배의 꿈은 ‘연세대 영문학과’ 진학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농구부 친구들과 차재억 선생님을 다시 만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입시 상담에서 선생님의 한마디가 그의 꿈에 찬물을 끼얹었다.


“홍배, 니 어디 가고 싶노?”


“저는 연세대 영문학과에 가고 싶습니다.”


“니 연세대 영문학과는 운동할 때나 쉽게 갈 수 있었지. 지금은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저는 언어가 좋고, 영어가 좋은데 안 됩니까?”


“경북대 영문학과로 목표를 잡아보는 게 어떻겠노?”



홍배는 실의에 빠졌다.

연세대 영문학과만을 목표로 삼았던 그는 다른 선택지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특히 서울에서 농구부 친구들과 차재억 선생님을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마음마저 무너졌다.

결국 그는 진로를 재고하기 위해 자퇴를 결심했다.


“연세대 영문학과 못 갈 거면 안 갈란다.”


그의 마음속에는 깊은 좌절과 방황이 자리 잡았다.

삶의 방향을 잃고 어딘가를 헤매던 그의 여정은, 나눔과 사랑으로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추억과 철학을 떠올리게 했다.

그 추억은 앞으로의 홍배에게 또 다른 길을 열어주게 될 터였다.

그의 인생은 비록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홍배의 방황은 어쩌면 그가 새로운 길을 찾기 위한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그가 가진 나눔과 사랑의 철학은 언제나 그의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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