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주 저지시티 윤여태 시의원
“보이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도전을 포기하지 말라”
뉴저지주 저지시티 윤여태 시의원
맨해튼의 우뚝 솟은 빌딩숲을 시원하게 조망하는 뉴저지 저지시티(Jersey City, New Jersey). 허드슨 강 연안에 맞닿아 있어 뉴욕 맨해튼을 오가는 수많은 통근자들에게 포근한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위성도시다. 모름지기 도시의 풍경을 한눈에 담으려거든 도시 심장에서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라 했다. 저지시티는 맨해튼 야경 명소로 소문난 곳이기도 하다. 뉴욕 경제와 관광을 받치고 있는 이곳 저지시티에 한인 이민역사의 새 장을 쓰고 있는 사람이 있다. 저지시티 시의회에서 2선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여태(마이클 윤, Michael Yun) 시의원을 만나본다.
인지도 높이려 나비넥타이 매기 시작해
윤 의원의 하루는 곱게 나비넥타이를 매는 것으로 시작한다. 거울 속 윤 의원은 말끔한 정장 차림에 화려한 나비넥타이를 걸치고 있다. 곱게 빗은 머리, 얼룩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안경까지 완성해야 출근 준비가 끝난다. 늘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을 유지하는 일이 성가실 법도 한데, 윤 의원은 항상 예의바르게 시정활동에 임하고자 스스로를 단정하게 갖춘다고 말한다. 통넓은 고무줄바지를 입으면 나도 모르게 팔자걸음이 나오고, 허리가 꼭 맞는 바지에 하이힐을 신으면 저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 일자걸음을 걷게 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나비넥타이는 이제 윤 의원의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이 나비넥타이에 웃지 못 할 사연이 있다. 그가 처음 시의원이 되고자 결심하고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2013년만 해도 한인유권자가 6명밖에 없는 인구 8만의 광역선거구였다. 게다가 지난 백여 년 동안 아일랜드계가 독점한 지역이라 다른 인종이 선거에 나서는 일은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그는 동양인 시의원 후보를 지역구민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스스로 나비넥타이를 매고 현장을 누볐다. 언제나 진심과 열정은 통하는 법. 사람들은 그를 '나비넥타이 신사'로 기억하기 시작했고, 이내 지지율로 이어졌다. 그는 아직도 공식석상에 나서는 날이면 나비넥타이를 맨다. 덕분에 형형색색 화려한 나비넥타이를 수집하는 버릇이 생겼다.
'정치 1번지'에서 첫 아시안 시의원 탄생
저지시티는 뉴저지에서 뉴왁에 이어 인구가 두 번째로 많은 도시이자 맨해튼과 인접한 '정치1번지'로 통한다. 그곳에서 동양인, 무소속 시의원의 탄생은 기적과도 같았다. 민주당과 타민족 표밭인 저지시티에서 설움도 많았다. 선거기간 내내 상대후보 진영의 도를 넘는 흑색선전에 몸살을 앓았다. 특히 아이리쉬계 사람들은 유세장에 아시안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공작을 펴기도 했다. 여기에는 시장, 경찰까지 동원돼 부정부패의 전형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현역 주하원의원인 상대 후보를 56%라는 과반수이상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승리했다. 기득권 세력의 전횡에 염증을 느낀 유권자들의 표심이 윤 의원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이때부터 윤 의원은 영어 이름 마이클 윤 대신 미라클 윤(Miracle Yun)으로 불렸다.
저지시티에서 40여 년 동안 살면서 지역사회에 공헌
험난한 정치 여정을 듣고 있자니 문득 그의 인생이 궁금해졌다. 윤 의원은 1979년, 20대 중반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유신정권 말기의 한국은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숨쉬기 힘든 답답함을 느꼈다.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열망에 무작정 미국을 선택했다. 처음 시작한 일은 야채가게, 생선가게 일용직이었다. 자유와 새로움에 이끌려 이민을 왔지만 팍팍한 일상이 그를 옥죄었다. 미국사회에서 그는 물에 섞이지 못하고 동동 뜨는 기름 같았다. 이민 1세대가 대단한 이유는 모든 것을 스스로 개척했기 때문이다. 선대가 닦아놓은 터전이나 유산 없이 맨몸으로 부딪히다보니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런 과오를 다음 세대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아 상공인단체인 허드슨한인실업인협회 회장을 맡아 한인들을 밀어주고 끌어주는데 힘을 모았다. 이후 9년 동안 저지시티 부시장을 맡았다. 무보수의 봉사직이었지만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일찌감치 그의 리더십을 알아본 지역 주민들은 그에게 정치를 해보라고 권했다.
“아시안이라고 무시당하는 꼴은 못참죠. 80년대 초에 저지시티에서 작은 서점을 운영했어요. 한창 뉴저지주에 한인 타운이 만들어질 때죠. 차별과 텃세가 말도 못하게 심했습니다. 새로 들어오는 한인 개척자들이 똑같이 겪을 것을 상상하니 화가 났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권익 찾기에 나섰지요.”
베이프론트 재개발사업에 적극 나서
남들이 은퇴를 준비할 나이인 50대 후반에 정치 도전은 큰 모험이었다. 지역사회 판도를 바꾸고 싶은 열망 하나로 시작했다. 발로 뛴 그의 노력이 통한 것일까. 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그를 열렬히 지지한다. 시의원이 된 후에도 그는 여전히 한인들의 상권 보호와 정부와의 갈등 해결사로 통한다. 윤 의원은 항상 단정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출근하지만 사무실 상황은 전혀 단정하지 않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원실은 늘 '불난 호떡집'같다. 밀려드는 민원과 지역구 현안이 산적해있는데다 최근에는 저지시티 동쪽 해켄색 강가에 있는 베이프론트 재개발사업에 힘을 쏟고 있다. 저지시티가 최근 4억 달러 채권 기금을 발행해 베이프론트 지역 산업 용지를 사들였는데, 이곳이 앞으로 부동산 개발회사와 민관 합작으로 개발된다. 저소득층에 임대할 주상복합 주택과 강변공원이 갖춰질 예정이다. 여기서 또 한 번 윤 시의원의 적극적인 활동이 필요하다. 개발 규모가 워낙 커서 주택, 상가, 사무용 건물 등을 각각 쪼개 계약을 맺는다. 한인 부동산 회사와 개발업체들이 적극 참여할 절호의 기회다. 한인들이 기술과 능력 면에서는 절대 뒤지지 않지만 입찰 시기를 놓친다든가, 정보에 어두웠다든가 하는 어이없는 실수 때문에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윤 의원은 늘 이점이 아쉬웠다.
“주류사회로 진출하려면 적극적으로 나서야죠. 경제적으로 성공해야 힘이 생깁니다. 방법을 잘 모르겠다면 저에게 연락하세요. 필요하면 시정부 해당 부서나 책임자와 연결해 줄 수 있어요. 그 역할을 하라고 저를 뽑아준 것 아니겠습니까?”
6.25전 참전기념비 건립에 앞장서
2013년부터 꼬박 6년을 시의원으로 지냈다. 그동안 지역사회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개발업자들의 특혜로 여겨졌던 부동산세 감면 정책의 부당함을 알리고 투쟁한 결과 2017년 부터는 완전히 중단됐고, 시의 행정을 투명하게 견제해 허투루 쓰이는 세금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다. 한국계 시 의원으로서의 활약도 눈부시다. 저지시티 리버티주립공원을 가보면 미군 병사가 부상당한 한국 병사를 부축하는 형상을 본뜬 높다란 동상과 6.25전 참전 공원이 보인다. 윤 의원의 작품이다. 공원 부지를 마련하고 참전 조형물을 만드는데 발 벗고 나섰다. 공원은 추모비를 중심으로 34개의 화강암 석판이 원형으로 병풍처럼 둘러싼 형태이다. 석판에는 치열한 전장뿐만 아니라 한강변의 빌딩숲 등 한국의 최근 발전상까지 선명하게 담았다. 게다가 안쪽의 한반도 지도 석판에는 독도를 새기고 선명하게 동해(East Sea)라고 표기했다. 한반도 지도에 동해와 독도가 새겨진 유일한 참전비이다.
세계 미술 중심지에 우리 미술 알려
뉴욕과 뉴저지에 한국 예술을 알리는 데에도 꾸준히 노력했다. 그 결과 지난 2014년에는 저지시티 최초로 외국 대학 미대 학생들을 초청해 전시회를 열었다. 회화·조각·목공예·산업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의 예술품 40점이 저지시티 시청 루텐더 갤러리에서 외국인 관람객들을 맞았다. 신진 한국작가들의 재기발랄한 작품들을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뉴욕에 소개하고, 그들의 활동 기반을 넓히는데 윤 의원이 다리 역할을 했다. 이제는 문화와 예술이 곧 권력인 세상. 윤 의원은 경제 발전만으로는 미국사회에 한국의 힘을 보여주기 턱없이 부족하다면서 앞으로도 예술 분야 교류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현재 자리에서 최선 다하면 때에 이를 것
재선 시 의원으로서 그의 임기는 오는 2021년 말까지다. 3년 뒤의 행보를 묻기에는 때이른 줄 알면서도 윤 의원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앞으로 할 일도 지난 6년간 해온 일과 똑같아요. 그동안의 의정활동을 되돌아보고 실용적인 정책을 더 많이 만드는 것, 책임행정과 투명한 행정을 이루는 것이 제 일이죠.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준비된 정치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춰가다보면 때에 이르지 않겠어요?”
윤 의원이 '때'를 강조한 이유가 있다. 사실 그는 지난 2017년, 저지시티 시장에 출마할 계획이었다. 당시 윤 의원의 시장 당선은 낙관적이었다. 허드슨카운티의 영향력 있는 정치인 25인에 선정되기도 했고, 저지시티의 저명한 정치평론가들로부터 차기 시장후보 1위로 지목받기도 했다. 저지시티 시장은 주지사, 주상원의장 등과 함께 뉴저지 주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높은 직책인데다 세계의 경제수도인 뉴욕 인근인 뉴저지 주 ‘정치 1번지’의 시장이라는 영향력까지 갖는 자리다. 하지만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시장 선거에 나서려면 100만 달러 정도 선거자금이 필요한데 당시 모금액이 경쟁 후보와 비교할 때 턱없이 부족한 상태였다. 시장 선거는 중도에 포기하고, 시 의원 재선에 도전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운신의 폭은 무궁하다. 최초의 한인 시의장이라는 새로운 꿈을 가질 수도 있고, 다시 선거자금을 모아 시장 선거에 나설 수도 있다.
1세 정치인으로서 책임 있는 활동할 것
어떤 직함을 갖든 정치인 윤여태의 신념은 한결같다. '한인 이민 1세가 타민족 정치인보다 모범이 되는 의정 활동을 하고, 주민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 오직 한 가지다. 한인 2세와 3세들이 미국 정치에 도전할 때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도록 선구자의 길을 닦는다는 마음으로 늘 책임 있는 정치 활동을 한다. 좋은 평판을 받기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같은 한인이니까, 같은 동네 사는 이웃이니까 조금이라도 후원을 해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으로는 정글 같은 정치판에서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되기 일쑤다. 윤 의원은 일찌감치 이 생리를 파악했다. 그리고 한인사회에 뛰어들어 오랜 시간 봉사하면서 숙성의 시간을 거쳤다. 한인사회에서 인정을 받아야 다른 민족에게도 인정을 받을 수 있다. 외롭고 소외된 이방인으로 살 것인가, 주인의식을 갖고 역사를 개척해 갈 것인가는 우리 이민자의 선택이다. 윤 의원은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했다.
“보이지 않는 두려움 때문에 눈에 보이는 도전을 포기 하지 마라. 두려움은 두려움에 지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하라. 최선을 다한 것도 차선이니 결과에 실망하지 마라. 정직하라. 굉장히 귀하기 때문에 가지고 있으면 큰 값을 받을 수 있다. 꾸준하라. 결과는 복리계산으로 받는다.”
또 한 번 '미라클 윤'이 되기 위해 도약 중
윤 의원은 미국이라는 기회의 나라에서 주어진 기회에 만족하지 않고,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리고 미국이, 미국 정부가 주는 혜택을 받는 입장에서 벗어나 무엇이든 미국인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한인의 모범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에는 뉴저지주에서 유난히 많은 한인 정치인들이 탄생했다. 오랫동안 미국 정치 현장에서 활동한 선배로서 그는 새내기 정치인들에게 초심을 잃지 말고 봉사하고 노력하라고 말한다. 뉴욕에 비해 뉴저지는 한인 정치인들이 많이 나올 수 있는 입장이다. 뉴저지는 565개의 작은 타운으로 구성되어 있어 정계 입문이 상대적으로 유리하다. 작은 지역 정치인들끼리 힘을 모아 큰 지역 정치인을 만들 수 있고, 로컬 타운에서 시작해 주하원의원과 주상원의원, 연방하원의원과 연방상원의원까지 성장할 수 있는 구조다. 한인 이민 120년 역사에 큰 획이 그어질 날이 머지않아 보인다. 그 주인공이 '미라클 윤'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