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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l 20. 2019

멋과 풍류를 즐기는 독일인 선비, 베르너 사세

“그림 그리기는 해방이다. 처음에는 언제나 불안, 영혼을 짓누르는 압력,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 때로는 분노도 있다. 한글임이 흐릿하게 나타난다. 대부분 산이나 암벽, 먼 해안, 나무. 그러면 첫 획을 긋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나면 나와 그림 사이에는 일종의 대화가 시작된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림의 주인이 아니다. 흰 종이 위의 붓이 검은 선을 그으며 자신들의 삶을 시작한다. 나는 다만 대답하는 자, 그림이 질문을 던지면 대답을 할 뿐이다.” - 베르너 사세 



그는 독일인이다. 위아래 청청패션을 빼입은 멋쟁이 유럽 신사의 모습이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유려한 한국말이 내 귀를 확 잡아당겼다. 마치 외화시리즈에서 배우 입모양에 맞춰 한국 성우의 더빙을 입힌 듯한 생경함에 잠시 아찔했다. 그런 반응쯤은 이미 익숙한 얼굴이다. 사세는 해맑게 웃으면서 “한국 온지 오래됐죠. 지금은 제주도에 살아요.” 말한다. 한국이 좋아서 한국에 눌러앉아 수묵화를 그리는 교수, 아니 이제 화가가 더 잘 어울리는 베르너 사세를 뉴욕에서 만났다.   




세상을 생각하는 수묵화가 

자신 있는 분야,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는 말하는 목소리가 신나기 마련이다. 그는 자신의 그림 이야기를 할 때 유독 눈이 반짝이고, 말이 빨라지며, 목소리가 활기찼다. 그의 그림에는 일정한 선과 색이 없다. 무심하게 툭 붓을 얹어 그려낸 과감한 선이 매력이다. 작품 구석에 새긴 낙관이 유독 눈에 띈다. 생각 사(思), 세상 세(世)를 조합한 자신의 한자이름 사세(思世). ‘세상을 생각한다'’ 뜻이다.  

너무 익숙하면 쉽게 지나치기 마련이다. 조상 대대로 한국 사람인 우리에게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객관적이지 않다. 한국인이 아닌 타인의 시선이 어쩌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그의 작품은 한국을 끔찍하게 사랑한 외국인의 존경과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미대에 들어가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반대하셔서 꿈을 접었죠. 취미로 계속 그려왔습니다. 다만 교수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에 작품 활동을 하면 나의 연구 활동이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인식될까봐, 굳이 밝히지 않았을 뿐이지요.” 


사세는 오랜 시간 교수로 재직했다. 독일 모교에 최초로 한국학과를 만들고, 꾸준히 한국학을 연구한 그가 돌연 화가가 되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어느 날 갑자기가 아니다. 그는 말보다 그림이 편한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그림과 대화하면서 사춘기 터널을 지났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그림을 그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에게 그림은 은밀한 취미생활이었다. 서재에서 혼자만 감상하던 그림을 이제야 세상에 내놓았을 뿐이다. 어느 날 사세의 집에 들른 등산회원 중 한 명이 그의 그림에 반해 전시회를 제안했고, 마침 그날 그 회원이 전남대 미술학과장이더라는 기막힌 우연 덕분이다.  





붓의 흐름에 맡긴 자유로운 화풍 

사세의 그림은 이상한 수묵화다. 얼핏 보기에는 동양화인데 실은 서양식 추상화에 가깝다. 한지라는 바탕에 먹과 물, 흙을 사용해 단순하면서도 한국적인 묵선의 느낌을 살려낸다. 한국의 자연에서 얻은 감성과 서양의 철학적 사유를 결합해 사세만의 독특한 수묵으로 재탄생했다. 거기에는 한가롭게 거닐면서 노는 것의 담백함과 자유스러움마저 느껴진다. 그리고 우리를 그 자유 속에 편안하게 들어오도록 유도한다.  


사세의 그림을 가만히 보면 무언가 할 말이 있는 소년처럼 보인다. 그의 그림은 붓이 가는대로 흐름을 따르고 있다. 화면 중심부에 힘 있는 묵선을 배치하고 배경에는 상대적으로 최소의 여백이 결합된다.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천천히 멈추면서 음미하다가 곧 새로운 획으로 힘을 쏟는다. 그리고 이내 적당한 순간에 붓을 툭 놓아버리는 그림이다. 색에 있어서도 시차를 두고 겹겹이 올린다. 일필휘지가 아닌 수차례의 붓질을 더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자유로운 선 구성이 그의 가장 큰 특징이다. 기존의 수묵과는 확연히 다르다. 정규교육 없이 오직 재능과 열정으로 뿜어낸 예술 세계이기에 한층 신선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의 선으로 고요함과 생동감을 동시에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수묵화의 매력이에요. 검은 먹과 흰 여백이 균형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팽팽한 긴장감을 이루기도 합니다. 흰 면과 검은 면이 이야기를 나누며 이따금 색을 요구하기도 하지요. 이 때 내 임무는 조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사세는 화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요즘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다. 한국에서 크고 작은 전시회를 수십 번 했고, 얼마 전에는 모교인 독일 보흠대학교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모두 2006년 이후 사세의 수묵 작품들이다. 그 전에는 유화와 템페라를 주로 썼다. 과거 작품들을 보면 같은 작가의 그림이 맞는지 눈을 의심할 만큼 결이 다르다. 어떤 변화가 그의 작품 세계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을까? 2006년은 그가 독일에서 교편을 내려놓고 완전히 한국으로 돌아온 해이다.  




독일에 한국학과 만든 '한국 전도사'  

사세가 처음 한국에 오게 된 계기가 재미있다. 1966년 전남 나주 호남비료공장의 기술고문으로 부임한 장인을 따라오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장인은 한국인 청소년들의 기술 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그는 강사로 일했다. 당시 한국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삭막한 모습.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유로웠다. 쪼들리는 와중에 인심이 넘쳐났고, 생김새와 언어가 다른 이방인에게 친절했다. 첫 인상이 강렬해서일까. 독일에 돌아가서도 머릿속에 한국이 둥둥 떠다녔다. 25년 동안 유럽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독일 청년에게 동양은 신비한 미지의 세계였다.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한데 이상하게 자꾸만 알고 싶어진다. 그래서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서독에는 한국학과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동아시아과에 들어가 일본학을 전공하면서 한국문학을 파고들었다. 한국이 궁금해 조금만 더 배워보자 했던 것이 서독 최초의 한국학 박사학위라는 타이틀을 안겼다. 보흠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서 한국학과를 만들고 자타공인 '한국 전도사'가 되었다.  


독일에서 사세에게는 언제나 '처음', '유일'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랐다. 80년대만 해도 한국학은 희귀학문이었기 때문. 과를 개설한 첫 해 수업에 들어온 학생은 세 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행복했다. 한국말과 역사, 문학을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다. 지금은 독일 6개 대학에 한국학과가 있다. 전체 정원은 300명이 넘는다. 이만하면  유럽에 뿌린 한국학 씨앗이 무사히 싹을 틔워 무럭무럭 자란 셈이다. 다 키운 자식 품에서 놓아주는 기분으로 사세는 홀가분하게 독일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독일에서 태어났지만 어쩌면 전생의 한국인이 독일로 유배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서슴없이 전라도라고 대답합니다. 고향에 돌아왔으니 묻힐 때까지 여기에 있어야죠.”  


아내 홍신자는 훌륭한 예술 동반자 

사세는 아내 홍신자와 함께 제주도에 머물고 있다. 9년 전 결혼식도 제주도에서 했다. 현대무용 대가인 홍신자는 그의 훌륭한 예술 친구이자 동반자이다. 밝고 열정적인 아내와 결혼한 이후 그의 작품은 한층 깊어졌다. 함께 있으면 그저 기분이 좋고, 다양한 영감이 떠오른다. 결혼 후 모든 시간과 감정을 서로 나눈다. 자연히 집에 있는 시간도 늘었다. 편안하게 집중하는데 아내가 큰 도움을 준다고 고마움을 나타냈다.  


제주도 생활에 대해 묻자 지중해를 닮은 쨍한 빛이 제일 마음에 든다고 대답한다. 멀리 바다와 산이 내다보이는 언덕배기에서 감상하는 일몰이 일품이라고. 빠르고 복잡한 서울보다는 천천히 움직이는 시골이 좋고, 독한 위스키보다는 걸쭉한 막걸리가 좋다고 말한다. 이웃들과는 친구처럼 지낸다. 오가다 마주치면 인사도 건네고, 감자나 옥수수를 찔 때는 일부러 한솥 가득 쪄서 나눠먹는다. 이따금씩 막걸리 초대를 받으면 기분 좋게 어울린다. 





세계에 한국 전통 세시문화 알릴 것 

화가로 활동하면서 본연의 한국학 연구도 꾸준히 한다. 몇 년 전부터 1850년대 한문 <동국세시기>를 번역하고 있다. 풍속, 풍습, 명절, 제사 등 한국의 계절 문화를 담은 책이다. 사세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이 스스로 전통을 외면하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한문을 영어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이 작업은 거의 막바지 단계다. 몇 년 동안 꼼꼼하게 진행한 만큼 곧 완성도 높은 번역본이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  


앞서 사세는 <민낯이 예쁜 코리안>을 쓰기도 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하는 독일 석학의 따끔한 충고가 화제를 몰고 왔다.  ‘복원을 위한 복원’ 차원에서 한옥을 홍보하고 개발하는 현실을 지적하고, 아무도 입지 않는 한복을 '국가 브랜드'라는 명목으로 밀어붙이는 행태를 신랄하게 꼬집은 대목이 인상적이다. 이 또한 애정이 있으니 쓴소리를 할 수 있었으리라. 사세는 독일사람, 한국 사람으로 나누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강조한다.  



“나는 백인이고, 유럽에서 왔고, 학자이고 또 나이가 많고. 그것뿐이에요. 그것 외엔 한국인과 다를 게 없어요. 독일 사람이 한국문화에 관심 갖는 것을 신기해할 필요도 없어요. 내가 사는 곳에 대해 제대로 공부해서 알리고 싶은 것뿐이에요.” 



이쯤 되면 열정부자라 부를만하다. 유유자적 흐르는 대로 즐기며 살아온 것처럼 보였으나 조금 가까이서 들여다봤더니 쉼 없이 갈퀴질을 하는 백조였다. 사세는 준비 중인 출간이 마무리되면, 아내와 함께 또 한 번 뉴욕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때는 화가 베르너 사세의 '뉴욕 특별전'이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내비쳤다. 그의 바람이 왠지 허공에 맴도는 빈말로 사라질 것 같지는 않다. 열정부자가 하는 일이니 어떤 식으로든 실현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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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너 사세(Wener Sasse, 思世)  


독일 프랑크푸르트 태생으로, 1966년 선진 독일기술을 한국에 전파하기 위한 기술․외국어교사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독일로 돌아가 서독 최초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독일 보흠대학교와 함부르크대학교에 한국학과를 만들었다. 한국의 정취를 잊지 못해 2006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와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에서 한국인에게 한국을 알리는 교육을 하였다. 세계적인 전위무용가 홍신자와 결혼 후, 제주도에 터전을 잡았다. 

서울 정우갤러리, 제주 노리 갤러리, 강릉 하슬라미술관 등의 초대로 작품을 전시했으며, 최근에는 독일 보흠대학교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한지와 먹물, 진흙을 이용해 동서양의 균형과 조화를 표현한다. 전시회에는 작가의 예술세계와 석학으로서 보는 한국적 가치와 멋스러움에 대해 설명하고 관람객들과의 토론을 즐긴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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