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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란 무엇인가' 원로에게 길을 묻다

전 워싱턴한인회장 강철은

by 끌로이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요! 일단 우리 만납시다.” 시원스러운 목청에 더위 먹은 귀청이 뻥 뚫렸다. 수화기 너머로 두 팔 벌려 반갑게 맞이하는 모습이 훤하게 떠올랐다.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려 이 어른이 반색하는 걸까. 궁금한 마음으로 버지니아 그레이트 폴스로 향했다.



지난해, 워싱턴 한인회장을 지낸 강철은(74세)이 워싱턴 한반도포럼을 만든다고 했을 때, 지역 여론은 들썩였다. 그는 소위 이민자 대선배이다. 한국외대를 마치고 1974년 미국에 넘어와 학업과 사업을 병행했다. 이민 7년 만에 워싱턴한인회장 자리에 앉았다. 그때 그의 나이는 삼십대 중반. 젊은 한인회장 탄생을 계기로 워싱턴D.C. 한인사회는 보다 푸르고 힘차게 결집했다. 그런 강철은 선생이 다시 이 지역 원로 한인들을 불러 모은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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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한 톨 없이 빳빳하게 다린 하늘색 셔츠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그가 가장 먼저 안내한 곳은 거실 한 편의 응접실. 오래된 그랜드 피아노와 벽을 빼곡하게 에워싼 고서적, 사진들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그곳은 부부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과거 처음 미국 땅을 밟았을 때, 한인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당시, 그리고 세 자녀가 성장해 그들의 부모처럼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모습이 순차적으로 담겨있다. 아내 손을 잡고 외로이 정착한 이 땅에서 이제 그들의 가족은 손자, 손녀까지 합쳐 모두 14명이다. 그래서인지 그 공간을 차근히 소개하는 선생의 눈빛이 유난히 형형했다. 오랜 시간 씻기고 바랜 선생의 백발도 덩달아 반짝였다.



“나에게 보수냐 진보냐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나는 중도라고 대답합니다. 편을 나누는 것 자체가 분열의 시작이지요.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길이 진정 나아가야할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정치는 편 나누지 말고 이치 따져야

의외의 대답이다. 선명한 색을 갖고 외길 인생을 걸었을 것 같은 그의 입에서 '중도'라는 표현이 나오자 사뭇 놀랐다. 보수냐, 진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한국 정치 발전을 우선 따져야 한다는 논리이다. 한국의 답답한 정치 행태에 염증을 느껴 한때 직접 정치에 뛰어들기도 했다. 민주공화당 출신으로 5선을 지낸 박찬종 전 의원을 보좌하며 서울특별시장 선거를 도왔다. 이후 제1야당의 총수였던 이기택의 특별보좌관으로 정당에 몸담은 시절도 있었다. 당시 활동에 대해 설명을 부탁하자 또 다시 눈빛이 반짝였다.



교포의 시선으로 한국 정치에 쓴소리 뱉어

90년대 당시 한국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국회의원지역선거구를 단위로 하는 지구당으로 구성돼있었다. 지구당 운영의 가장 큰 문제는 막대한 비용. 사무소를 상시 운영하기 위해서는 매달 일정함 임대료와 인건비를 쏟아야 한다. 못해도 한 달에 천만 원은 드는데 이 비용을 감당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지구당 제도는 쓸데없는 거품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구당 운영 경비를 조달하기 위해 위원장에게 의존하면서 정치부패의 폐해가 심각했다. 그때 그가 묘안을 제시했다.



“내가 회의체로 두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죠. 사무실을 따로 두지 말고 새마을운동처럼 회의체로 운영하는 겁니다. 평소에는 각자 생업에 있다가 사안이 있을 때에만 헤쳐 모여 하는 식으로 말이죠.”


민주시민당 만들어 정치 개혁 시도하기도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단칼에 거절당했다. 미국에서 살다 온 양반이 한국 정치에 대해 뭘 알겠느냐는 일종의 무시도 깔려 있었을 테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2004년, 지구당은 완전히 사라지고 중앙당과 시·도당에 모두 흡수된다. 그가 미국에서 보고, 듣고, 체감한 선진 정치문화를 한국에 접목시키려 목소리를 높여봐도 보수적인 정치 집단은 요지부동이었다. 오랜 시간 고국을 떠나 있었던 탓에 한국에서도 이방인 취급을 당하기 일쑤였다. 정치 참여의 한계를 느낀 그는 급기야 당을 만들었다. 이름은 '민주시민당'. 당의 목표는 파격적이다. 매관매직의 수단인 비례대표제를 없애고 1인 소선거구제를 2-3인 중선거구제로 바꿔 선거 과열을 막겠다는 주장이다. 오랜 시간 한국 정치에 관심을 갖고 고민해온 원로이기에 던질 수 있는 제안이다.



워싱턴 한반도포럼, 한인 힘 모으는데 주력

다시 워싱턴 한반도포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가 다시 워싱턴D.C. 한인 인사들을 모은 이유가 이제 조금 납득이 간다. 한국 사회에서 보는 정치와 한발 떨어져 미국에서 바라보는 정치를 비교해 보고, 동포들의 고견을 전달하기 위함이다. 지금까지 모두 네 번의 회의를 했다. 11명의 정규 포럼 회원들과 전직 한인회장들을 포함하여 30여 명이 모인다. 파행을 거듭하고 있는 워싱턴 한인연합회 사태에 대해 해법을 찾기도 하고, 남북 정세에 관한 시국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몸은 미국 땅에 있어도 진짜 소중한 것은 절대 잃지 않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플라톤이 말했죠.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고. 워싱턴 한반도 포럼은 동포사회에 한반도가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알리고, 평화 프로세스에 어떻게 참여 할 것인가를 논의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해서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민주화운동 주역들과 좌담회 계획

앞으로 워싱턴 한반도포럼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인사들을 초청해 좌담회를 열 예정이다. 학생과 시민이 중심 세력이 되어 일으킨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인 4.19 혁명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아울러 5.16 군사정변, 6.15 남북공동선언에 대해서도 폭넓게 다룰 계획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 우리가 해외 동포로서 한국 사회에 어떤 도움을 보탤 수 있는지 답이 보일 테니까 말이다.


강철은 회장은 동포들이 미국 주류사회에 쉽게 진출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드러냈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조직력과 정치자금이 부족해 매번 유리천장에 가로막혀 주저앉고 만다면서 미국정치의 핵심인 지방자치 중심의 성격을 잘 이용해 동포들의 힘을 모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성숙한 회의 문화 배우지 못한 현실이 부끄러워

그러던 그가 문득 학창시절 HR시간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연이어 HR시간에 뭘 했느냐고 물었다. 보통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습하는 시간으로 보낸다. 우리는 HR이 무슨 약자인지도 잘 모른다. 홈룸(Homeroom), 다시 말해 학급회의 시간인 게다. 그는 첫 HR시간을 또렷이 기억한다. 회의 주제가 '변소를 어떻게 깨끗하게 유지할 것인가?'였다. 어린이회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하려는데 아무도 발언을 하지 않고 서로 쭈뼛쭈뼛 눈치만 보던 모습이 어린 그에게는 꽤 충격적이었나 보다. 회의를 통해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해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그 현실이 충격적이었다.


반대를 위한 반대,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국회, 토론은커녕 막말과 고성만이 난무한 여야 대치 상황은 바로 어릴 적 학급회의를 제대로 배우지 못한데서 기인한다.


“가장 기본적인 교육조차 안 시켰으니 당연한 결과이지요. 우리네 정당을 보면 반대만 있지 토론이 없잖습니까. 그런 거 보면 많이 답답합니다. 우리 세대의 실수를 다음 세대는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성숙한 타협과 의사표현 방법을 배워야 하는 이유이지요.”

어른이 대단한 이유는 단순히 나이와 연륜 때문만은 아니다. 변화무쌍한 풍파를 겪어내면서 무언가에 열정을 쏟아온 그들의 인생이 대단하다. 45년 굴곡진 이민 인생을 살아낸 그의 눈에서 혜안이 보였다.




각자의 생활을 존중하며 3대가 함께 사는 집
이 어른이 사는 모습을 조금 더 들여다볼까? 강회장 부부는 딸네 가족과 함께 산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붙어산다. 지붕은 하나인데 대문은 두 개이다. 서로 출입구를 따로 만들어 완벽하게 독립된 생활을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손녀 곁에 산다고 하면 흔히 육아를 도와주려나 보다 하고 넘겨짚는다. 노부부는 4살, 6살짜리 손녀들 육아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아침, 저녁으로 조잘거리는 손녀들과 볼 비비는 인사를 나눌 뿐이다. 이것이 바로 3대가 함께 사는 방식이다.


연로한 부부의 연약한 무릎을 고려해 계단 없는 단층 주택으로 설계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가구 배치가 눈에 띄었다. 넓은 거실에 3인용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미니멀 인테리어란 이런 것인가. 부인 강연진씨는 딸의 아이디어라고 소개하면서 꼭 필요한 것들로만 채워진 이 공간이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딸이랑 같이 산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다들 말렸어요. 그러다 가족끼리 의상한다고요. 부모는 딸에게 효를 요구하고, 딸은 부모에게 끝없는 희생을 요구할 때 문제가 생기죠. 부모, 자식 사이라도 서로의 인생을 존중하면 문제될 것이 없어요.”



부부의 집을 보니 살아온 궤적이 얼추 보인다. 그는 분명 선택과 집중에 능한 정치 낭만주의자일 것이다. 그리고 대화가 몇 마디 오가자 추측은 이내 확신으로 굳었다. 그가 왜 '어른 중의 어른'으로 불리는지 이제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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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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