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 꿈을 짓다', 뮤지컬 배우 강동우
“뉴욕은 꿈으로 빚어진 콘크리트 정글. 이곳에서는 못할 것이 없죠. 왜냐하면, 당신은 뉴욕에 있으니까요. 이 뉴욕의 거리가 당신을 새로 태어나게 해줄 거예요. 화려한 불빛들은 당신에게 영감을 주겠죠. 이곳이 바로 뉴욕. 뉴욕의 이야기를 들어봐요.” (In New York, Concrete jungle where dreams are made of. There's nothing you can't do. Now you're in New York. These streets will make you feel brand new. Big lights will inspire you. Let's hear it for New York) - JAY Z / Alicia Keys의 'Empire State Of Mind' 노래 중
이 정글에 이민가방 하나 짊어지고 꿈이라는 도박에 과감하게 배팅한 청년이 있다. 신예(新銳), 새로 나타나서 만만찮은 실력이나 기세를 보이는 사람이라고 사전에서는 정의한다. 그냥 신예라고 부르기에는 이 청년 눈빛이 심상치 않다. 온화한 부드러움 속에 당장 달려들듯이 맹렬한 사자의 씩씩거림이 느껴진다. 뉴욕 뮤지컬 무대에 뛰어들어 이제 갓 안착한 배우 강동우이다. 뮤지컬 '왕과 나(The King and I)'에서 '룬타' 역으로 미국 순회공연을 마치고 뉴욕으로 돌아온 강동우를 만나본다.
'왕과 나' 전국 투어로 화려하게 데뷔
강동우를 설명하면서 '왕과 나'를 빼놓을 수 없다. 그가 맡은 역할은 왕의 후궁 텁팀과 사랑의 도피를 하는 룬타. 미국에서 제작해 무대에 올리는 뮤지컬 중 동양인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은 한정적이다. 태국을 배경으로 한 '왕과 나', 베트남을 배경으로 한 '미스 사이공' 정도가 전부인데, 이마저도 동양인 배우들끼리의 캐스팅 전쟁이 치열해 그야말로 바늘구멍이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 강동우가 따낸 룬타 역은 특히 수많은 배우들이 탐내는 자리였다. 젊은 동양인 배우가 실력을 뽐내기에 안성맞춤인 매력적인 배역이기 때문이다.
“큰 무대와 관객석들을 바라보면서 노래를 할 때 기분이 정말 좋아요. 웅장한 오케스트라 음악과 관객들의 박수는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왕과 나’라는 작품이 좋은 메시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저에게 커튼콜은 더 큰 의미로 다가왔어요. 관객들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했다는 생각에 뿌듯했죠.”
28개 도시 돌며 '무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 배워
'왕과 나' 뮤지컬 팀에 합류해 4개월 동안 미국 플로리다 주를 시작으로 캐나다 오타와, 뉴욕·뉴저지·캘리포니아·텍사스 주 등 28개의 도시 무대에 섰고, 20만 명 이상의 관객들을 만났다. 미국 뮤지컬은 한국처럼 한 배역을 두 배우가 요일별로 나눠서 소화하는 더블 캐스팅이 없다. 그 배역을 할 수 있는 배우는 단 한명, 일주일에 여덟 번 꼬박꼬박 일정을 이어간다. 결코 만만치 않은 여정이다. 체력 소모가 상당하다. 구멍 난 소금자루를 지고 빗속을 걷는 것처럼 하루하루 몸이 닳는 느낌이었다. 사람인지라 유난히 몸이 무거워 하루 종일 푹 자고 싶은 날이 있고, 노래는커녕 입도 뻥긋하고 싶지 않은 날도 있다. 그런데도 그는 매일 일정한 속도로 질주했다. 그에게는 똑같은 테이프 재생하듯이 기계화된 일상의 반복일지라도 관객들은 매일 바뀌기 때문이다. '왕과 나'를 예매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관객들을 생각하면 단 한 순간도 소홀할 수 없었다.
강동우는 28개 도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곳으로 오리건 주 포틀랜드(Portland City in Oregon)를 꼽았다. 3200석이 일주일 내내 가득 찼고, 관객 반응 또한 가장 열정적이었다. 배우들의 대사마다 크게 웃고, 뜨겁게 박수쳐 준 포틀랜드 시민들을 잊지 못한다. 뮤지컬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관객과의 직접적인 호흡이 아닐까. 무대와 객석의 거리는 불과 3m 남짓. 배우들은 관객과 눈을 마주하고 연기한다. 숨소리, 땀방울 하나까지 고스란히 전해지는 그 투명한 맛에 중독돼 오늘도 힘차게 달린다.
'왕과 나' 룬타로서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는 날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을 펑펑 쏟으며 노래했다. 공교롭게도 극 중 룬타 역시 떠나는 설정이라 진심을 담아 최고의 몰입감으로 눈물 연기를 했다. 룬타의 심정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마주한 것 같았다. 공연을 시작한지 4개월이 되어서야 말이다. 그때 그는 '무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대해 배웠다. '왕과 나'는 그에게 아련한 전 여친이자, 희로애락을 함께 한 절친이다.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돼
4개월짜리 대장정 무대에 선 경험이 체력적, 정신적으로 한 단계 성장한 계기가 됐다. 목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좋은 소리를 내는 창법을 터득했고, 어떻게 해야 매일 쌩쌩한 몸을 유지할 수 있는지 관리법을 터득했다. 리허설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지 않는 대신 본 무대에 최대한 몰입하는 식으로 체력을 안배한다. 공연 직전에는 기도와 명상으로 집중력을 높인다.
“나만의 관리법이라 할 것 같으면 잠을 많이 자고, 운동을 꾸준히 하는 거예요. 또 충분히 먹고 절대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겁니다. 무리해서 굶거나 근육을 키우면 바로 목에도 영향을 미치거든요. 덕분에 다행히 한 번의 배역 교체도 없이 제가 다 소화할 수 있었죠.”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 콘서트'로 일찌감치 눈도장
모름지기 신인이란 다소 어설프고 좌충우돌 실수 투성이어야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신인답지 않게 자기관리에 노련하다. 그도 그럴 것이 강동우는 이미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 콘서트'에서 '왕과 나' 주제곡 'I have dreamed'를 불러 진한 인상을 남겼고, 브로드웨이 최고의 디너쇼 공연장으로 알려진 ‘54 below’에서 '프랭크 시나트라' 공연을 하기도 했다. 굵직한 무대에 여러 번 선 경험이 그를 내진 설계가 잘 된 단단한 배우로 만들었다.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는 그야말로 스타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귀중한 무대이다. 일 년에 한번 20명 정도만 선택된다. 여기에 뽑히기 위해 수백 명의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 몰려든다. 모두가 웅장한 고전 음악을 들고 나와 고음 대결을 펼칠 때, 그는 발랄하고 재미있는 노래를 불렀다. 'She loves me' 뮤지컬의 한 곡이었다. 나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노래가 무엇인지 고민하자 금세 답이 나왔다. 유쾌하고 밝은 곡이 그에게 가장 잘 맞는 옷이었다. 나를 똑 닮은 노래였기에 편하게 춤을 추면서 애드리브를 넣는 여유까지 부릴만했다. 전략은 통했고,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에서 강동우를 인상깊게 본 연출자와의 인연으로 연달아 큰 무대에 서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노래와 연기는 자신이 있지만 춤은 아직 배우는 중
뮤지컬은 노래, 연기, 춤, 삼박자가 조화를 이루는 종합예술. 이 중 하나라도 무너지면 좋은 배우라는 칭호를 받기 어렵다. 강동우는 어떤 배우일까? 이 물음에 그는 “노래와 연기는 자신이 있지만 춤은 아직 배우는 중”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중앙대학교 연극학과 3학년을 마치고 뮤지컬을 배우기 위해 훌쩍 뉴욕으로 왔을 때가 불과 3년 전. 유학생이 되어 맞이하는 미국 뮤지컬 세계는 또 다른 층위였다. 지금까지 해왔던 창법과 연기를 모조리 뜯어고쳐야 했고, 영어 발음의 벽에 부닥치게 되면서 그는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AMDA에서 기본기부터 다져
그래서 선택한 학교가 2년 과정의 엠다(American Musical Dramatic Academy·AMDA)였다.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기본부터 차근차근 배웠다. 학문을 위한 지식의 상아탑보다 지금 당장 무대에 서도 손색이 없을만한 제대로 된 배우를 길러내는데 특화된 학교이다. 일주일에 세 번씩 뮤지컬과 연기수업을 하고, 네 가지 댄스 수업을 한다. 게다가 엠다 교수는 학생을 한명씩 개인 과외한다. 보컬레슨, 발음, 발성 수업을 받으면서 실력이 폭발적으로 늘었다.
“엠다가 갖고 있는 커리큘럼과 학교의 분위기가 저를 더 열정적으로 임할 수 있게 만들어줬어요. 무엇보다 학교에서 사는 느낌이 좋았어요. 굉장히 피곤하고 힘든 과정일 수도 있죠.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일에 이렇게 열정적으로 정신을 쏟는 시간이 저에게는 동기부여가 됐어요.”
3학기가 되면 정신없이 바빠진다. 연기와 뮤지컬 수업에는 듀엣과 트리오 혹은 5명 이상의 장면 연기를 해야 하는 숙제가 있고, 다른 친구들의 발표에 간간이 참여하기도 한다. 심지어 댄스 수업에도 파트너 댄스가 들어가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리허설 시간을 정하느라 정신이 없다. 밥도 굶은 채 숙제 준비에만 매달린다. 엠다 친구들은 훌륭한 동반자인 동시에 경쟁자이기도 하다. 수업이 끝나면 발표 준비를 위한 연습실을 예약하려고 줄을 선다. 그 과정이 꽤 치열해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잔디밭에 누워 햇볕을 쬐는 따위는 캠퍼스 낭만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밤늦게까지 연습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그 시간마저도 그에게는 연습이었다. 기숙사에서 학교까지 걷는 시간은 15분 정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속으로 많은 꿈들을 그리며 학교와 기숙사를 오갔다.
최고령 학생이라는 부담감이 자양분돼
강동우가 이토록 학교 수업에 열심이었던 이유가 뭘까? 그는 동급생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른바 '만학도'였다. 이미 한국에서 대학을 3년 다닌 상태였고, 그 사이 군대를 다녀오느라 그의 나이는 26이 훌쩍 넘어 버렸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갓 뉴욕에 상륙한 18살짜리 동급생들보다 7,8년 형님인 셈이다. 그뿐인가. 나이는 둘째 치고 영어가 가장 높은 벽이었다. 몸만 다 큰 사자였지 뉴욕에서는 아장아장 걸으며 말을 떼기 시작한 아기 사자에 불과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건가? 이 길이 과연 맞는 길일까?' 자괴감에 괴로웠다.
“틀린 발음들이 있으면 선생님께서 바로 지적을 합니다. 그런데도 고쳐지지 그 자리에서 될 때까지 계속 시켜요. 곁에서 보고 있던 친구들이 웃기도 하는데 그 순간은 얼마나 창피했나 몰라요. 마치 유치원생이 선생님 앞에서 한글을 배우는 느낌이었어요.”
어떤 사람은 25세에 CEO가 됐다. 그리고 50세에 사망했다. 반면 또 어떤 사람은 50세에 CEO가 됐다. 그리고 90세까지 살았다. 이렇듯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시간대를 살아간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앞서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뒤쳐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모두 자기 자신의 경주를 자신의 시간에 맞춰서 하고 있는 것 뿐. 강동우는 이르지도 뒤쳐지지도 않았다. 그의 시간에 맞춰 아주 잘 성장하고 있었다. 낙담하려는 자신을 또 다른 자아가 괜찮다고 다독이면서 그렇게 다져나갔다.
나만의 목소리 색깔 찾으려 노력 중
투어를 마치고 돌아와 이제 그는 도약할 준비를 한다. 룬타 역할에 굳어진 발성을 새롭게 고치고, 그 만의 목소리를 찾는 중이다. 목을 활짝 열기도 하고, 코에 힘을 넣어보기도 한다. 쉽지 않은 길이지만 그는 연습의 힘을 믿는다. 하다 보면 언젠가는 제 색깔을 찾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왕과 나'라는 큰 작품에 주역으로 데뷔했으니 이제 브로드웨이 무대에 아찔하게 활강하는 일은 시간문제로 보인다.
실력으로 피부색 장벽 넘어 보고파
뉴욕 맨해튼 남단의 배터리공원에서 출발해 바둑판 모양으로 배열된 거리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북으로 통하는 브로드웨이. 그 길에 늘어선 41개의 극장에는 지금껏 브로드웨이를 거쳐 간 수만 명 배우들의 땀과 눈물이 응축돼있다. 브로드웨이는 일명 화이트웨이라 불릴 정도로 백인 배역 비율이 압도적인 곳. 대부분의 작품이 유럽을 배경으로 하는데다 백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탓이다. 백인 배역이라면 실력이 비슷해도 동양인보다는 백인을 선호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정글에서 그는 실력으로 피부색을 넘어보고자 한다. 그냥 좀 잘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월등한 실력을 갖춰야 한다. 강동우의 최종 목표는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웨스트엔드 무대를 넘나드는 배우가 되는 것. 앞으로 좋은 배역을 맡아 S.CASA와 다시 인터뷰하고 싶다고 수줍게 웃는다.
그의 꿈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발음과 인종의 벽을 넘어 동양인이 백인 역을 맡는 선례를 남기면 미국 브로드웨이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의 진입 장벽이 조금은 낮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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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우
2019, Broadway By The Year
2018-2019, National Tour of The King and I 네셔널 투어 데뷔
2018, 17th Annual Broadway Unplugged
2018, Broadway’s Greatest Hits
2018, Frank Sinatra : The Second Century 뉴욕 54 below 데뷔
2018, 12th Broadway Rising Stars Concert 뉴욕 타운홀 데뷔
2018, AMDA, NY – Certificate completion 수료
2011-2013 / 2015-2016, Chun-Ang University, Acting Department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