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Q Lim, 임규진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면,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 Q Lim, 임규진
뮤지컬 42번가를 보고 나온 소녀가 말한다. “엄마, 나는 뮤지컬 배우가 돼야겠어.” 엄마가 대답한다. “뮤지컬 배우는 모든 걸 다 잘하는 사람이 하는 거야. 춤도 잘 추고, 노래도 잘하고, 연기도 해야 하는데 할 수 있겠어?” 말잘 듣는 소녀는 엄마의 말을 굳게 믿고, 다시 발레에 열중한다. 그로부터 10년 뒤, 소녀는 어릴 적 막연하게 품었던 뮤지컬 배우의 꿈이 문득 떠올랐다.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 숨어있었던 게다. 소녀는 다시 용기내서 말한다. “엄마, 나 뮤지컬 배우가 하고 싶어요.” 이번에는 대답이 달랐다. “그래 우리 딸, 하고 싶은 것 다해. 엄마가 어떻게 도와주면 될까?” 의외의 반응이다. 말릴 거라 예상했던 엄마, 아빠가 이렇게 든든하게 밀어주다니. 덕분에 소녀는 뉴욕으로 건너와 원하는 학교에서 원하는 노래와 춤, 연기를 마음껏 배운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난 오늘. 부푼 꿈을 안은 소녀는 어엿한 브로드웨이 뮤지컬 배우로 성장했다. 한여름 뙤약볕보다 뜨거운 배우, Q Lim(임규진)을 만나본다.
도대체 Q가 누구야?
뮤지컬 <왕과 나>에 버마공주 ‘텁팀’이 등장했을 때, 객석은 술렁였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신선한 연기와 청량한 목소리가 관객을 홀렸다. 사람들은 공연 포스터를 들춰보면서 “도대체 Q가 누구야? 어디서 온 배우야?” 궁금해 했다. Q의 첫 브로드웨이 무대는 꽤 강렬했다.
처음 Q가 맡은 역할은 주인공 대역인 언더스터디 겸 앙상블. 뉴욕으로 건너와 뮤지컬을 시작한지 6년만이다. 배우에게 브로드웨이는 꿈의 무대로 꼽힌다. 처음 캐스팅 전화를 받았을 때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20년 만에 브로드웨이로 돌아온 대작 공연에, 그것도 링컨센터에서 하는 공연에 주역으로 서게 되었으니 말이다. 공연장이 링컨센터라는 뜻은 브로드웨이 최고의 예술 감독인 바틀렛 셰어(Bartlett Sher)와 최고의 음악 감독 테드 스퍼링(Ted Sperling)이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이 기회를 잡기 위해 Q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모은 돈을 몽땅 노래 과외비로 쏟아 부었다.
<왕과 나>에 대역으로 시작해 브로드웨이 전국 투어에서는 주역으로 올라섰다. 작품의 배경이 태국인 탓에 대부분의 배우가 동양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자란 배우들, 다시 말하면 영어가 모국어인 동양계 미국인 배우들이었다. Q처럼 유학을 와서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1세대 뮤지컬배우는 Q가 유일했다.
모두가 늦었다고 말할 때 지독한 노력으로 열매 맺어
Q의 작품 이력을 보면, 미국 뮤지컬·드라마 아카데미(AMDA)를 조기 졸업하자마자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 19인의 한 사람으로 타운홀 콘서트에 출연해 뮤지컬계의 유망주로 부상했다. <판타스틱스> 주인공역으로 데뷔했고, 경쟁이 치열하기로 소문난 디즈니 크루즈 라인에 한국인 최초로 앙상블로 참여했다. 이력서 몇 줄만 보면 탄탄대로를 매끄럽게 걸어온 신데렐라처럼 보이지만, 지난날은 쓰라렸다.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배웠던 터라 배우가 되어서도 춤을 주로 담당하게 될 줄 알았다. 노래를 하더라도 여럿이 함께 부르는 합창 정도의 역할만 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학교에서 노래를 체계적으로 배우면서 서서히 희망이 피어났다. 무조건 안 된다고 잘라 말하는 대신 연습하면 늘 수 있다고 지도한 선생님들의 공이 크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의 성량이 신기해 자꾸 연습하게 됐고, 연습량이 늘자 실력은 저절로 늘었다. 운동을 열심히 하면 지방이 빠지고 근육이 붙는 것처럼 노래도 열심히 하면 목의 근육이 달라진다. 이미 인간승리를 맛본 Q는 자신 있게 말한다.
“노래 못하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에요. 노력하면 달라집니다! 제가 노래 공부를 20살 때 시작해서 부족한 점이 많았어요. 소리를 내는 방법조차 몰랐죠. 그래서 한동안 제 목소리를 찾는데 집중했어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유명하다는 뉴욕 보컬 선생님들을 찾아서 개인 과외를 받고요. 저한테 맞는 선생님을 찾기 위해 정말 많은 시간을 투자했죠.”
영어 표준어 발음기호의 달인이 되다
영어 대사는 또 어떤가. 여러 민족이 뒤엉킨 미국은 이민자의 발음에 익숙하다. 꼭 정확한 발음이 아니어도 뜻이 통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일반 사회생활이라면 그렇다. 그런데 직업이 배우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대사전달이 우선인 배우는 정확한 발음으로 연기를 해야 한다. 이 '기본'이 갖춰지지 않아 중요한 배역을 놓치기도 여러 번. 학교 다닐 때는 제대로 못 알아듣는 Q때문에 수업 진도가 안 나갈 정도였다. ‘쟤는 왜 여기 있는 거야’ 라는 친구들의 싸늘한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대학 때 저희 뮤지컬과에 외국인이 저 혼자였어요. 당시 저는 수업 내용을 한 마디도 못 알아듣는 상태였고요. 연기수업이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무능하게 느껴졌죠. 그래서 영어 표준어 발음 기호를 하나하나 그려가면서 연습했어요. 하루 종일 같은 발음만 연습한 적도 있죠.”
Jinny, Gyu Jin, Coco, Grace, 결국 Q Lim
발레리나 소녀가 노래 잘하는 배우로 성장하는 사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동안 Q를 수식하는 이름들도 혼란스러웠다. 외국인이 발음하기에 '규진'은 우리가 우드(would)를 발음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름 한다고 하지만 아무도 규진을 한 번에 정확히 부르지 못했다. 마지막 음절을 따서 지니(Jinny)라는 예명을 쓰다 편입한 학교에서 본명을 쓰게 하는 바람에 다시 규진으로 돌아갔다. 그때도 역시 규진은 '쥬'로 변질됐다. 제발 정확하게 불리고 싶어 모두가 발음하기 쉬운 코코(Coco), 그레이스(Grace)로도 잠시 살았다. 돌고 돌아 지금은 그냥 큐 림(Q Lim)이 좋다. 학교 친구들은 지니로 기억하고, 디즈니 크루즈 라인 동료들은 그레이스라고 기억할지언정 Q는 지금의 선명한 이름이 마음에 든다. 오랜 시간 깎고 다듬어 드디어 만족스러운 제 목소리를 찾았듯이.
화려함 뒤에 감춰진 치열함
과거에 비해 한층 음색이 안정됐고, 표정이나 연기도 제법 여유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Q는 여전히 미완성이라고 말한다. 오디션을 통해 선택받아야 하는 배우에게 연습은 숙명과도 같다. 짧은 십여 분 동안 준비한 모든 것을 쏟고 오디션장을 나설 때면 거하게 배팅한 도박사의 심정이 들기도 한다. 동양인 배우에게는 주어진 배역이 많지 않다. 부족한 실력은 연습으로 채울 수 있다지만 타고난 머리색과 생김새, 피부색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오디션 경험조차 Q에게는 소중하다.
누군가는 말한다. 눈부신 조명 아래서 예쁜 옷을 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려한 직업이라고. 적어도 겉보기에 화려한 직업임에는 틀림없다. 전국 투어 공연 기간에는 공연이 없는 날, 짬짬이 동네를 둘러보는 여유도 가진다. 공연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와볼 일이 없는 지역에 발을 딛는 소소한 재미가 쏠쏠하다. 그럴 때마다 Q는 생각한다.
“이렇게 공연을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복 받은 일이구나.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죠. 저는 다행히 좋아하고 잘하는 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잖아요. 이렇게 내가 사랑하는 노래와 춤, 연기를 실컷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감사해요.”
숨고르기하며 보컬 지도자 과정 도전
뮤지컬 <왕과 나>를 4년 동안 해왔다. 지난해 전국 투어 공연을 마치고 올해는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그동안이 전력질주였다면, 올해는 인터미션인 셈이다. 잠깐의 휴식마저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Q는 에스틸(Estill Master Program) 지도자 과정에 도전했다. 노래할 때 쓰는 모든 근육을 배우는 과학적인 프로그램인데, 말하자면 내 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제대로 소리를 내보내는 방법을 알려주는 프로그램이다. Q가 에스틸을 시작한 이유가 있다. 그 역시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조금 불편해보면 안다. 자신이 겪었던 과정을 다른 사람이 똑같이 불편해하는 것을 보면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지 보인다. Q는 1세대 한국인 뮤지컬 배우로서 영어와 노래가 서툰 유학생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민다. 자신이 했던 방황을 후배들은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그가 기꺼이 선생님을 자처하기로 했다.
남편은 훌륭한 선생이자 조력자
이 과정에는 남편 대니얼이 큰 역할을 했다. 동료 배우였다가 성우로 전향한 대니얼은 Q에게 가장 가까운 선생이자 경쟁자이자 조력자이다. 더블유(W)와 유(U) 사이의 미세한 발음 차이를 짚어준 이도 대니얼이다.
“안했기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해보지도 않고 '나도 노래를 잘 할 수 있나요?' 묻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도 예전에는 그랬죠.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그런 저에게 열정과 용기를 가르쳐준 사람이 대니얼이에요.”
한 배역에 몰려드는 배우들은 수천 명. 매번 수천대 일의 경쟁을 뚫고 발탁된다. 물론 합격한 횟수보다 낙방한 횟수가 훨씬 많다. 아무리 이력이 난다 해도 거절이란 녀석은 당할 때마다 아프다. 그럴 때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자신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도 배우의 요령이다. Q는 매번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많이 힘들었다. 최종 캐스팅 결과를 결정짓는 요소는 다양하다. 운 때문일 수도 있고, 날짜, 상황, 생김새, 키, 인종 등 어떤 요소가 작용할지는 알 수 없다. 꼭 실력 탓인 것만 같아 자책했었다. 이제는 대니얼에게 기댄다. Q를 가장 잘 이해하고 믿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Q는 남편 대니얼과 함께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그 곳에서 뉴욕의 물가, 집값, 오디션 경험, 배우의 주급까지 그야말로 아낌없이 친절하게 나눈다. 뮤지컬 배우 부부의 삶을 진솔하게 엿볼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흑역사라 할 수 있는 굴욕적인 기억을 끄집어내 불특정 다수 앞에서 세세히 까발리는 일이 쉽지는 않다. Q는 그래도 괜찮다고 말한다. 조각 정보조차 구하기 힘들어 고군분투하는 유학생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자신의 경험담쯤은 백번도 더 공개할 수 있다.
브로드웨이 한국인 배우 모임 주최 콘서트 열고파
그리고 브로드웨이의 숱한 동양인 배우들을 경쟁자가 아닌 동반자로 만들기 위해 '한국배우모임'을 만들었다. 어느새 23명이 모였다. 대부분 미국에서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교포들이다. Q처럼 유학생 신분으로 시작한 배우는 4명에 불과하다. 뉴욕 브로드웨이 진입장벽이 얼마나 높은지 가늠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마저도 처음 모임을 시작했던 5년 전에는 10명에 불과했으니 나름의 성과라 할 수 있다.
모이면 힘이 생긴다. 서로의 어려움을 보듬다 보면 뜻밖의 기회가 생기기도 한다. 앞으로는 23명의 배우들끼리 콘서트도 열고, 자선 활동도 펼칠 예정이다. Q는 말이 갖는 힘, 언령(言霊)을 믿는다. 입 밖으로 소리 내 외쳐보면 언젠가 그가 내뱉은 말들이 그를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까.
Q는 살아온 나날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배우이다. 지금까지 브로드웨이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고 자신의 노래와 연기색을 찾는데 집중한 시기라면, 지금부터는 자신을 알리고 연기폭을 넓히는데 집중할 시간. 머지않아 브라운관에서 반가운 Q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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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배우 Q Lim, 임규진
2008 파이브 타운스 칼리지(Five Towns College) 입학
2009 American Musical and Dramatic Academy(AMDA) 편입
2011 AMDA 뮤지컬과 수료
2016-2018 왕과 나(The King and I), 텁팀 주역, 첫 번째 브로드웨이 미 전국 투어
2015 왕과 나(The King and I) at Lincoln Center, Tuptim 주역 브로드웨이 데뷔
2015-2016 왕과 나(The King and I) at Lincoln Center, 텁팀 언더스터디
2014 왕과 나(The King and I), 텁팀 주역 지방 공연
2012-2014 디즈니 크루즈 라인(Disney Cruise Line), 자스민/뮬란/포카혼타스
2011 디스인챈티드(Disenchanted!), 뮬란
2011 미스 사이공(Miss Saigon), 앙상블
2011 판타스틱스(The Fantasticks!), 여주인공 루이자
2011 브로드웨이 라이징 스타(Broadway’s Rising Stars), 솔로이스트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