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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 일터가 아닌 놀이터가 되려면...'

포근한 요리연구가, 혜경 포드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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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 일터가 아닌 놀이터가 되려면...'

포근한 요리연구가, 혜경 포드


한 여인이 농가에서 일하는 대여섯 명의 인부들을 위해 매일 식사를 준비해왔다. 한 끼를 준비하기 위해 새벽부터 시간을 들여야 했다. 여인의 하루는 밥만 차리다가 다 간다. 결국 그녀는 미쳐버렸다. 왜 정신을 놓아버렸던 걸까? 의사를 만나러 가는 길, 마차 안에서 여인이 읊조린다. "인부들이 20분 만에 싹 먹어 치웠어. 20분 만에 다 먹어 치웠어." 종일 준비한 음식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리자 여인은 급기야 미쳐버린다. 미국 작가 헬렌 이어링은 서글픈 중노동의 해법으로 이렇게 말한다.

“식사를 간단히, 더 간단히, 이루 말할 수 없이 간단히. 빨리, 더 빨리, 이루 말할 수 없이 빨리 준비하자. 그리고 거기서 아낀 시간과 에너지는 시를 쓰고, 음악을 즐기고, 곱게 바느질하는데 쓰자. 자연과 대화하고, 테니스를 치고, 친구를 만나는데 쓰자. 생활에서 힘들고 지겨운 일은 몰아내자.” - 헬렌 이어링의 <소박한 밥상> 중


미국에 한식 바람 일으킨 요리 블로거 Holly

요리, 먹고 살기 위해 음식을 만들어야 하는 문제에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땅에 터를 잡은 이민자라면 더욱 간절하게 공감하리라. 제일 먼저 친정엄마의 집밥을 떠올리고 요리법을 묻는다. 그러나 우리네 친정엄마들은 단체로 짠 것처럼 한결같이 요리법이랄 게 없다. 그저 '설탕 조금, 참기름 휘리릭, 소금 톡톡'이라고 지시한다. 혼란에 빠진 여러 새댁들을 구원한 요리 블로거가 있다. 스스로 '솥뚜껑 운전수 홀리(Holly)'라고 인사하는 혜경 포드이다.


혜경의 한글 블로그를 구독하는 사람은 만 육천 명이 넘는다. 영어로 기록한 블로그 구독자는 오천 팔백 명 정도. 인터넷에서는 본명 혜경보다 홀리라는 예명이 더 유명하다. 국적, 나이, 성별을 막론한 다양한 사람들이 그의 요리에 열광한다. 이유가 뭘까? 비결을 알고 싶어 임무를 수행하는 요원의 심정으로 그가 블로그에 소개한 요리를 하나씩 실천해봤다. 우선 가장 익숙한 순두부덮밥부터 만들어봤다. 혜경이 소개한 해물 순두부덮밥은 굴과 김치가 들어간 매콤한 일품요리. 언제든 빨간펜으로 교정이라도 볼 기세로 레시피를 한자 한자 되새김질해가며 따라 해본다. 남들은 잘 안 쓰는 특별한 재료가 들어가거나, 별난 숙성 과정이 필요할거라 짐작했지만 아니었다. 그저 쉽고 간편할 뿐이다. 이것이 홀리 요리의 마성이었다.


“오늘 저녁 손님을 초대했다고 쳐요. 어떻게 대접할지 신경 쓰느라 온종일 주방에 발이 묶이면 그날 그 손님초대가 악몽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죠. 정성, 당연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과잉정성은 독이에요. 레시피는 쉬워야 해요. 쉽다고 정성이 안 들어가는 것은 아니거든요. 요리하는 과정을 즐기세요.”


baklava.jpg baklava
brownie cookies.jpg brownie cookies
german boiled beef.jpg german boiled beef
hot milk cake.jpg hot milk cake


한식은 복잡하다는 편견 뒤집은 간편한 상차림 인기

매일 차리는 밥상에 매번 온갖 정성을 넣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내 노동이 된다. 레시피가 복잡하고 오래 걸리면 아무리 맛있어도 두 번 다시 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혜경은 간단한 요리로도 충분히 맛을 낼 수 있다고 강조한다. 어쩌면 간단한 과정으로 깊은 맛을 내는 일이 더 고급 기술인지 모르겠다. 요리를 마지못해 해야 하는 노동이 아닌, 즐거운 놀이로 여긴다면 맛에도 분명히 사랑이 담긴다. 혜경은 사랑담은 맛을 내려면 부엌에서의 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이라고 말한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한식은 어떤 모습일까? 열에 아홉은 김치, 불고기를 꼽는다. 혜경은 이 고정관념을 부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블로그 주제는 '김치 이상의 것(beyond kimchee)'이다. 여태껏 한식이라 하면 김치만 떠올린 당신, 당신이 모르는 엄청난 한식의 세계로 안내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외국인이 한식을 집에서 혼자 만들어 보려면 우선 쉬워야 했을 테다. 배추를 밤새 절인 뒤 북어 육수를 내서 양념을 만들어야 하는 김장김치 대신 혜경은 미국마트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고수에 소금, 고춧가루, 젓갈 정도만 곁들여 익히는 고수김치를 제안한다. 그렇게 보다 간결한 요리를 연구하다 보니 요리법이 깔끔해졌다. 정보가 넘쳐나는 맥시멀한 세상, 검색어 한 단어만 넣으면 세계 요리가 다양한 버전으로 찾아진다. 그 가운데 무엇을 버려야 할 지 아는 미니멀리스트의 지혜가 절실하지 않은가. 혜경은 불필요한 과정은 과감하게 버리되, 요리의 기본 원칙과 재료만 갖고 맛을 지키는 미니멀 요리법을 간파했다.


혜경이 이렇게 깔끔한 한식에 애착을 보이는 이유가 있다. 그는 미국인 남편과 결혼한 국제부부. 결혼 이후 30년째 줄곧 대만,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아르헨티나에서 살다 지금은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다. 해외 살이를 하는 동안 두 아이가 태어났다. 절반은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두 아이에게 정체성을 알려주고 싶었고, 그 수단으로 음식을 선택했다. 아이들이 장성해서 독립을 한 이후에도 엄마 밥이 그리울 때에는 언제든지 스스로 뚝딱 차려낼 수 있기를. 그 장면을 소망하면서 쉬운 방식의 한식 요리를 개발했다.


“어렸을 적 뭔가를 맛있게 먹고 있으면 어머니는 항상 이렇게 말씀하셨더랬죠. 농부에겐 한여름 쩍쩍 갈라진 논에 물 들어가는 게 제일 행복하고, 엄마는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게 제일 행복하다고. 부엌에서 새어나오는 어머니의 맛있는 요리 냄새가 저에게는 고향에 대한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어요. 외국에서 오래 살았기에 여러 나라 음식을 접하면서 살아왔지만 정말 내 가슴에 깊이 다가오는 음식은 한식이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에 대한 추억, 동경, 그리운 맛들을 제 손으로 다시 재해석해서 남기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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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weigian custard buns.jpg norweigian custard buns
oyster tofu rice bowl.jpg oyster tofu rice bowl
sausage mint pasta.jpg sausage mint pasta


30년의 외국 생활, 보고 터득한 요리

혜경이 처음부터 요리 전문가이지는 않았다. 결혼 전까지 제 손으로 라면 한번 제대로 끓여본 적 없는 소녀였다. 대학시절 그의 전공은 의상학. 보스턴 발레단 의상제작 보조로 일했고, 아동복회사에서 디자이너 보조를 지내기도 했다. 요리와는 삶의 결이 다른 직업이다. 결혼을 한 뒤 본격적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부유하면서 생존 본능이 작동했다. 내 손으로 만들지 않으면 당장 먹을게 없는 극한 현실이 그를 단기간에 요리 우등생으로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린 낯선 환경도 한몫했다. 시장에 나가면 처음본 식재료 천지였다. 세상에 이렇게 다양한 요리와 맛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대만에서는 색다른 중국풍 요리에 눈을 떴고, 싱가포르는 동남아 음식의 감칠맛을 일깨워준 곳이다. 홍콩은 동서양의 문화가 묘하게 뒤섞인 나라인 만큼 맛에서도 오묘함에 느껴진다. 전차를 타고 완차이 재래시장에 과일, 야채, 생선을 사러 다녔던 기억을 생각하면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말레이시아에 사는 동안 인도 음식의 색다른 매력에 빠졌다. 소고기가 유명한 아르헨티나에서는 가우쵸라 부르는 카우보이들이 구워주는 정통 바비큐가 맛있었다. 오랜 외국생활 경험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제가 새로운 음식에 이렇게까지 모험심이 강한 줄 몰랐어요. 이건 어떤 맛일까, 또 저건 어떤 맛일까 계속 궁금해졌어요. 주방장에게 물어보기도 해요. 그럼 보통 70%는 어떤 재료가 어떻게 쓰였는지 친절하게 알려줘요. 그 단서를 갖고 공부해서 맛을 재현해내죠. 쾌감이 있어요.”


삶의 궤적을 쫓다보니 그의 요리가 왜 유독 다국적 퓨전인지 이해가 간다. 혜경은 한식에 능통한 것은 물론 미국식 베이킹, 유럽 가정식에도 능통하다. 이름마저 생소산 바클라바(터키의 전통 파이. 종이같이 얇은 파이 반죽 사이에 견과류를 넣고 달콤한 시럽을 부어 만든 터키의 전통 과자)를 내놓지 않나, 소고기 수육에 쌈장이 아닌 홀스래디쉬소스를 끼얹고 독일식 타펠 슈피츠라고 하질 않나. 사람들은 오늘 저녁은 뭘 해먹을까 고민하면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그의 블로그를 기웃댄다. 그러다 이내 이색 요리를 구경하는 재미에 홀랑 빠져든다. 글과 사진으로 세계 여행을 하기도 한다. 혜경은 맛에도 온도가 있다고 말한다. 포근하고 따뜻한 맛은 자꾸 입안에 맴돌기 마련이다. 그의 요리들이 그렇다. 크게 자극적이지 않아도 돌아서면 계속 생각나는 포근한 맛이다.


한국 맛을 그리워하는 외국인과 소통하는 재미

입맛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감각이 아닐까. 우리는 생을 이어가기 위해 먹고, 행복해지기 위해 먹고, 친해지려고 음식을 나눈다. 혜경이 매일 지지고 볶는 그의 주방을 블로그에 연재한 지 10년. 처음에는 나만의 레시피를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시작했던 일이 이제는 한식을 사랑하는 세계인들과 소통하는 창구가 됐다. 그의 블로그에서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이 잡채, 해물파전을 말하는 것이 신기했다. 군인 신분으로 파병을 다녀왔거나, 어렸을 때 입양됐거나, 선교 활동을 했거나. 다양한 인연으로 한국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데에 놀랐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한국의 맛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동안 가장 반응이 뜨거웠던 음식은 닭갈비. 한 말레이시아 남성은 오래 전 비행기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한국인 여성과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함께 먹었던 닭갈비 맛이 사무친다고 했다. 지금 전 여자 친구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닭갈비 맛은 가끔 생각난다며 레시피를 요청해왔다. 정작 혜경은 태어나서 닭갈비를 먹어본 적이 한번 밖에 없다. 말레이시아 남자 사연이 하도 절절해서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다. 기억 속 어딘가 저장돼 있는 낡은 닭갈비 맛을 뒤져내 얼추 비슷하게 만들었다. 카레 맛이 향긋하던 매콤달짝한 닭갈비. 추억과 경험을 소환하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음식임에 틀림이 없다.


요리 기록 책으로 담아

모든 일이 그렇듯 새로운 도전이 늘 성공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레시피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주방을 초토화시킨 나날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갖다 버린 밀가루가 몇 포대며, 소는 몇 마리를 잡았는지... 언젠가 야심차게 중국식 짜장면을 개발한 날, 아들이 먹다 뱉은 적도 있다. 가족은 가장 냉철한 평가단이자 조력자인 셈이다. 그렇게 도전과 실패, 성공으로 점철된 10년의 기록, '코리안 쿠킹 페이보릿(korean cooking favorites)'이 이제 막 세상에 나왔다.


“전 그냥 레시피만 전달하는 매뉴얼 같은 요리책이 아닌 작가의 생각, 유머, 감성까지 함께 전달하는 요리책을 만들고 싶었어요. 좋은 글과 더불어 아름다운 사진이 함께 있어 읽은 사람의 상상력까지 날개를 펼치는 듯한 매력. 누군가의 삶을 이해하는데 음식이 중간다리를 놓아주는 거죠. 결국 요리는 공감과 사랑으로 마음을 움직여야 실천할 용기가 생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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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rimp pork dumplings.jpg shrimp pork dumplings
thai bbq ribs.jpg thai bbq ribs


혜경의 레시피는 깨끗하다. 주방을 크게 어지럽힐 일도, 몇 시간동안 다리 아프게 서있을 일도 없다. 게다가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의 조합이 신선한 풍미를 안긴다. 스테이크와 아보카도를 섞은 비빔밥에 사과를 갈아 넣은 특제 간장소스로 맛을 낸다. 혜경은 이 재료와 소스의 어울림이 특출한 맛을 보장할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한다.


인터뷰를 마쳐갈 즈음 혜경이 영화 한 편을 소개했다. 메릴 스트립이 주연한 '줄리 & 줄리아'이다. 르꼬르동 블루에서 프렌치 요리를 배운 전설의 셰프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을 보며 한 요리 블로거가 도장 깨기 하듯이 도전하는 긴 프로젝트를 담은 내용이다. 낯선 곳에 짐을 풀 때마다 독소처럼 스트레스가 쌓였다. 풀기 위해 혜경은 요리를 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줄리아와 많이 닮아 반가웠다. 혜경은 세상 또 다른 한쪽에서 다른 문화와 언어, 음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블로그가 자그마한 위로가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요리는 저의 절친한 친구에요. 앞으로도 이 친구와 곱게, 사이좋게 늙어 갈래요.”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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