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깨고 파격을 노래하는 테너 김건수
“내 노래의 중심은 사랑” 틀을 깨고 파격을 노래하는 테너 김건수
뉴욕 도심에서 한 발짝 벗어난 퀸즈 플러싱 타운홀에 한국 성악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플러싱은 동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해 첫 보따리를 푼 곳, 과거 코리아타운이라 불렸던 의미 있는 곳이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늦은 오후, 뉴욕 이민의 역사가 녹아있는 이곳에서 명쾌한 오페라가 연주됐다. S.CASA가 판을 벌여 뉴욕에서 활동하는 중견 작가들과 역량 있는 청년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문화예술 축제였다. 카랑한 목소리로 울림을 전한 테너 김건수다.
성악가는 노래만 잘하면 된다고?
로켓이 발사하듯 강렬한 발성이 터지자 청중의 눈과 귀가 일제히 김건수에게 향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귀가 호강한다는 황홀한 느낌이 드는 것도 잠시, 이내 한 편의 흥미진진한 서사에 젖어든다. 김건수의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과 머리, 몸통, 마음을 다 바쳐 정성스럽게 부르는 노래라고 평한다. 꿈틀대는 노랫말에 진심이 묻어난다는 의미이다.
“성악가는 노래만 잘하면 된다고? 아니오. 음악은 노래로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내가 가진 생각과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표현하고 공감을 얻으려면 마음을 여는 수밖에 없어요. 성악은 기술이 아닙니다. 감정 교류이지요.”
격의 없이 재미있게 노래하는 성악가
나긋나긋하지만 명료한 발성으로 그는 자신의 노래 철학을 설명한다. 고요하게 상대를 제압하는 힘이 느껴진다. 노래를 함에 있어 기술적인 뛰어남도 물론 중요할 터. 그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기술을 뛰어넘는 소통 능력이다. 'S.CASA 청년작가 초대전'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이력이나 배경에 아무 관심이 없다. 처음부터 성악가 약력 소개 같은 책자는 없었다. 편견 없이 오직 음악으로만 대화하려는 의도이다. 테너 김건수가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무대에 섰던 경력 몇 년차 성악가라는 정보가 관객들에게 주입되는 순간 음악은 변질된다. '산타 루치아'가 황혼의 바다로 배를 저어 떠나는 나폴리 해안 광경으로 순수하게 들리지 않고 'ㅇㅇ대 출신 김건수의 산타 루치아'로 들린다.
김건수의 무대는 겉멋이나 권위가 없다. 즉석에서 대사를 넣기도 하고, 노래 중간에 관객과 수다를 떨기도 한다. 음이 조금 틀리는 것쯤은 아무 상관없다. 관객들은 로봇처럼 정확한 음정, 박자로 노래하는 건조함보다 격의 없이 재미있게 노래하는 유연함에 환호한다. 그가 남긴 흔적은 꽤 도발적이고 상쾌하다. 클래식 음악은 딱딱하다는 고정관념을 시원하게 부순다.
“그때 반응은 잊을 수 없죠. 관객과 제가 무대를 함께 만들었어요. 보통은 그래 어디 얼마나 잘 하는지 한번 들어보자는 심산으로 팔짱끼고 째려보죠. 그런 곳에서는 저도 목이 굳어버려요. 저는 일방적으로 가사만 전달하는 광대가 아닙니다. 노래로 감동을 주는 예술가지요.”
사랑을 담아 마음으로 노래
테너로서 그는 단도직입적인 소리를 좋아한다고 했다. 가을을 이야기하는 노래에는 목소리에 가을을 담고, 사랑을 이야기하는 노래에는 사랑을 담는다. 그 외 조미료는 필요하지 않다.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노래는 반드시 울림이 남다를 테니까.
슈만과 클라라의 일화를 살펴보자. 실제로 슈만은 클라라와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많은 곡을 썼다. 18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에게 사랑받고 있는 명곡 '시인의 사랑'은 클라라가 없었으면 탄생하지 않았다. 사랑의 힘이 슈만에게 영감을 불어넣었고, 사랑의 빛과 달콤함 이면에 숨은 씁쓸함을 낭만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애정을 갖고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된다. 김건수는 사랑의 언어가 노래의 기본 재료라고 강조한다. 작곡가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가족관계, 사연을 알고 나면 노래가 입체적으로 해석되는 것과 맥락이 같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잘 낸다는 칭찬에는 별 감흥을 느끼지 않는다. 왠지 모르게 뭉클했다는 칭찬에는 어깨가 으쓱하다.
준비를 안하는 것이 준비..내려놓음의 미덕 깨달아
'성악가의 덕목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주저 않고 '감성 전달'이라고 꼽는다. 그것도 좋지만 우선 정확한 음정, 박자, 발성이 기본이지 않겠느냐 재차 묻자 테니스를 예로 들어 자세하게 설명했다. 공을 치려고 자세를 잡고 준비하면 이미 공은 빗나가고 만다. 준비를 안하는 것이 준비이다. 너무 잘하려고 많은 것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성악이 그렇다. 무언가를 잔뜩 준비해서 양껏 보여주겠다는 욕심으로 무대에 서서는 절대 만족스러운 노래를 할 수 없다. 내려놓을 것은 내려놓고 오늘 이 곳에서 한바탕 신나게 즐겨보자는 각오로 가볍게 임할 때 관객과 가수 모두 만족스럽다. 이 단순한 진리를 깨우치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네일살롱 운영하며 삶의 다양한 모양 배워
음악(音樂), 소리로 즐겁게 하다. 김건수는 이 의미 그대로 순수하게 즐기고 싶다.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마음속에 피터팬을 간직한다. 하지만 피터팬이 집세와 공과금을 대신 내주지는 않는다. 이상과 현실의 접점을 찾기 위해 그는 네일살롱을 운영한다. 언뜻 보기에는 도저히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직업군의 조합이지만 그는 네일살롱에서 얻는 음악적 영감이 좋다고 말한다.
“저는 예민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음악을 더 깊이 사랑하며 즐길 수 있었어요. 사업 또한 예민해야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제 감수성과 남다른 관찰력이 네일살롱 운영에 큰 도움이 돼요. 우리 가게에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어요.”
네일살롱이 그에게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세상을 배우는 교실이 된다. 십 년째 네일살롱을 운영하면서 천태만상의 사람들을 만났다. 기질적인 예민함에 사회적 연륜이 더해져 이제는 손님이 계산대 앞에서 지갑만 열어도 어떤 성격인지 바로 간파한다.
음악은 인종을 아우르는 유일한 수단
대하는 사람이 다양해지자 그가 설 수 있는 무대도 폭이 넓어졌다. 간디 탄생 150주년을 맞아 지난 9월, 뉴욕 롱아일랜드 간디 평화 정원에서 대규모 기념행사가 열렸다. 이날 무대에 김건수가 올랐다. 뉴욕 인도 총영사관이 주최하는 인도인들의 잔치에 한국인이 축하 무대를 꾸민 일은 이례적이다. 유태인 피아니스트와 러시안 소프라노, 한국인 테너가 함께 연주했다. 역시나 관객들 반응은 뜨거웠다. 인종을 넘어 음악으로 하나 된 순간이다. 이런 식으로 터키인들의 문화 축제에 불쑥 얼굴을 내밀기도 한다. 6.25 참전 용사인 할아버지를 추억하면서 기꺼이 함께 싸워준 형제의 나라에 고마움을 표한다. 이렇게 초대된 자리에서 그는 늘 이야기가 있는 노래를 한다. 얼마 전에는 뉴욕 링컨센터에서 독주회를 열었다. 오라토리오로 시작해 이태리 가곡, 독일 가곡, 아리라에 이르기까지 그가 좋아하는 노래로만 꽉 채운 공연이었다.
노래로 대화하는 게 직업인 김건수는 아는 것이 많다. 미국 사람과는 팝송으로 대화하고, 이탈리아 사람과는 이태리 가곡으로 대화해야 하기에 여러 언어와 문화에 관심을 둔다. 누군가에게 다가가기 위해 그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를 하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기다리는 마음', '그리운 금강산' 같은 한국 가곡을 꼽는다. 한국어 특유의 다정한 표현력은 한국어가 모국어인 한국 사람이 가장 잘 소화한다. 한국 가곡을 부를 때 그는 노래와 한 몸이 되어 완전히 음악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이태리 칸초네를 제가 부른다고 해봐요. 물론 가사는 다 외우고 있고 무슨 뜻인지도 알죠. 그렇지만 한국에서 나고 자란 저는 이태리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 못하기 때문에 노랫말을 완벽하게 전달하지 못해요. 그래서 저는 우리 가곡을 가장 좋아하고 가장 잘 부릅니다. 단어 하나하나 의미를 깊숙이 이해하니까요.”
늘 새로운 것에 목말라..음악과 미술을 결합한 콜라보무대 만들고파
지금까지 행보를 보면 그는 음악계의 이단아로 불릴만하다. 전형을 거부하고 자꾸 새로운 것, 독특한 것을 추구한다. 내년 6월에는 뉴욕 롱아일랜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열리는 아시안 축제에 참여하고, 워싱턴디시에서 열리는 콘서트 일정을 소화한다. 이 또한 김건수 특유의 유쾌한 무대로 만들 예정이다.
앞으로는 시각과 청각을 결합한 새로운 장르의 무대를 만들 계획이다. 이를테면 조선시대 민화 전시회에서 그가 아리랑과 씨름민요를 부르는 식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말했다. "내 영화는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이게 하지만, 그것을 흘러내리게 하는 것은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다." 죠스 영화에 빠밤 빠밤 서늘하게 강력한 배경음악이 없었다면 오늘날 죠스가 공포영화 장르의 조상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까. 마찬가지로 그는 공연과 전시를 콜라보해서 작가가 그림에서 말하고 싶어 하는 내용을 노래로 해설하고 싶다.
그의 바람은 명료하다. 개성과 다양성은 그대로 살리되 서로 적절히 배합해서 동반 상승효과를 내는 것. 그리고 그 열정이 뉴욕 바닥에 닿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석양을 보고 혹은 영화 한 편을 보고 감동한다. 감동은 숨바꼭질하듯이 일상 곳곳에 숨어 있다가 와락 뛰쳐나온다. 김건수는 감동이라는 정서를 음악으로 끌어와 삶의 복잡성을 다양한 모양으로 변주한다. 말과 노래에도 표정이 있다. 그는 자신의 노래가 늘 뻥글뻥글 웃는 표정으로 전해지기를 소망한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