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 Yang
“전달자 아닌 창작가로 빛을 보도할래요” NBC 앵커 은양
매일 아침 4시, 이른 아침을 깨우는 경쾌한 목소리가 있다. NBC방송 아나운서 은양이다. 눈은 마음을 비추는 창이고, 뉴스는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다. 창에 검은 때가 묻으면 뉴스가 잿빛으로 탁하게 비춰질 테고, 창에 노랑 셀로판지가 덧대어 있다면 푸른 하늘도 싯누런 노을빛으로 비춰질 테다. 뉴스가 그렇다. 어떠한 색도 입히지 않은 맑은 창의 역할이 절실한 이유이다. 은양의 눈빛에는 생기가 가득하다. 뉴스를 전달하는 앵커의 모습이 아닌 뉴스를 연기하는 앵커로서 뉴스에 감정을 담아 전한다. 은양의 뉴스는 역동적이다. 로봇처럼 감정과 의견을 철저히 배제하는 기존의 한국 뉴스와는 결이 다르다. 일종의 뉴스 큐레이터로서 한 편의 재미난 쇼를 구성하듯이 뉴스를 만든다. 그 와중에 뉴스에 인간 만사 희로애락이 담겨있다.
새벽 4시, 첫 뉴스 전하며 아침을 깨우는 앵커
앵커(Anchor), 원래 뜻은 바다에 배를 정박시킬 때 사용하는 갈고랑이 모양의 강철 닻이다. 뉴스 진행자를 아나운서 명칭 대신 앵커라고 하는 이유는 배의 닻처럼 중심을 잡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 은양이 NBC4 TV 메인 앵커로 아침마다 카메라 앞에서 닻을 내린지 어느새 16년이다. 은양의 하루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시작된다. 밤 9시에 잠들어 새벽 2시 15분에 일어난다. 새벽 4시, 첫 기사를 보도하기 직전까지 원고를 여러 번 읽고 다듬는다. 밤사이 들어온 사건 사고를 추리고 중요한 순서대로 분류하는 일도 그의 몫이다. 4시에 시작한 뉴스는 7시까지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어떤 날은 낮 동안 정오뉴스를 진행하기도 한다. 그것도 늘 생방송으로. 녹화방송 같은 NG나 다시 하기는 없다.
“저는 생방송의 긴장감을 즐겨요. 생방송은 우리의 인생과도 같다고 생각해요. 마음에 안 든다고 시간을 되돌려 없던 일처럼 만들 수는 없는 법이잖아요. 16년 동안 생방송을 진행하는 일이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결코 만만치 않죠. 혹시 실수를 하지 않을까 늘 노심초사하고요. 그래도 저는 제 일이 좋아요.”
워싱턴디시 지역 최초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리포터, WUSA 9 리포터 자리를 거쳐 NBC4 TV에서 16년 동안 아침 뉴스를 진행하는 사이, 그를 인정하고 알아봐주는 사람도 많아졌다. 2013년에는 제55회 캐피탈 체사피크 베이 에미상을 수상했고 워싱턴 매거진 선정 ‘DC 로컬 TV뉴스 스타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올해에는 은양의 NBC4 아침 뉴스팀이 미국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Television Arts and Sciences)가 주는 에미상을 받았고, 다문화 미디어 특파원 협회(Multicultural Media Correspondents Association)가 선정한 ‘2019 방송 저널리스트 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자리에서 꾸준하게 한길을 걸어온 은
양인지라 그의 노력을 인정하는 증서인 것만 같아 기뻤다.
원래 꿈이 앵커..방송 한 길만 걸어온 외골수
은양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이 뉴스앵커였다. 지역 뉴스에 나오는 여자 앵커들을 보면서 '나도 커서 저렇게 되고 싶다' 생각했다. 그 꿈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그래서 메릴랜드 대학에서도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졸업하기 전에 방송국에서 인턴을 지냈다. 매일 원고 정리 등 각종 잡일을 담당하는 제작보조를 일 년 동안 했고 이후 수습기자 생활 일 년이 지나서야 기자의 꿈을 이뤘다. 방송국 인턴 월급은 그야말로 출퇴근 차비 수준밖에 안됐다. 돈은 적지만 일은 많았다. 무슨 직책이나 담당도 없이 방송국 선배들이 주는 모든 일을 하는 만능 막내였다. 그래도 행복했다. 그가 그토록 꿈꿨던 방송국이었기 때문이다. 은양은 20대 초반 첫 직장에서의 경험이 오늘날 은양 앵커를 만든 자양분이었다고 말한다.
“첫 직장 생활은 그야말로 잡부였지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연연하거나 부끄러워한다면 앵커의 꿈을 이루지 못했을 거예요. 그곳에서 방송국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몸으로 부딪혀가며 배웠어요.”
은양은 한국계 미국인 앵커. 서울에서 태어나 세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해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서 자랐다. 미국이 샐러드 볼(Salad Bowl)이라 일컬어지는 다문화, 다인종의 사회라 할지라도 한국계 여성 앵커가 한 자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지켜왔다는 것은 단순히 일을 열심히 했다는 의미를 뛰어넘는다. 젊고 유능한 후배들과 당당히 경쟁해 생존했으며, 유색 소수인종으로서 주류 인종들보다 몇 배 더 치열하게 노력한 산물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취재가 가장 기억에 남아
2009년 눈 폭풍이 워싱턴디시 일대를 집어삼켰을 때 은양은 6시간 동안 단독으로 현장 상황을 생중계했다. 또 대통령 취임식, 교황 미국 방문 등 굵직한 국제 행사를 취재하면서 간판 앵커의 입지를 다졌다. 뭐니 뭐니 해도 은양이 가장 돋보였을 때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현장에서 취재했을 때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주관 방송사인 미국의 NBC가 평창 동계올림픽을 전 세계에 중계할 앵커로 은양을 발탁했다. 세계가 일제히 동계올림픽 소식을 쏟아낼 때 미국 방송사들은 '퓽챙 윈터 올림픽'이라 소개했다. PyeongChang이라는 낯선 단어를 그들은 이렇게밖에 발음할 수 없었다. 오직 은양 앵커만이 '평창'이라고 또박또박 발음했다. 고국에서 개최되는 동계올림픽 소식이 반갑고 자랑스럽기는 하지만 뉴스 진행자들이 죄다 퓽챙이라 불러대니 뉴스를 듣는 한인들은 은근 속이 부대꼈다. 은양이 정확하게 평창이라 불러줘서 고마웠다. 작은 차이라도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미국 전역에 퓽챙이 아닌 평창을 알리는 일을 은양이 했다. 한국계 앵커이기에 가능한 발화이다.
은양은 2월 한 달 동안 한국에 머물며 올림픽 소식을 전했다. 현장에서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과 어울렸다. 한국 사람들이 친절하고 따뜻하다고 칭찬할 때에는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은양은 어렸을 때부터 영어와 한국어를 같이 사용해 한국말에도 유창하다. 현지에서는 기사, 앵커의 역할 외에 통역사의 역할도 했다.
“자랑스러웠죠.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제가 NBC를 대표해 파견된 거잖아요. 마치 제가 국가대표가 된 듯한 느낌이었어요. 한국 사람들이 겉으로는 차갑게 보여도 막상 다가가면 정겨워요. 평창에서 외국 선수들과 기자들이 한국인 특유의 정을 느꼈다고 말할 때 뿌듯했어요.”
마메 바이니 선수 인터뷰 인상 깊어
경력이 깊은 베테랑 앵커인 만큼 그동안 만나 인터뷰한 인물이 상당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을 묻자 은양이 또 다시 평창 동계올림픽 이야기를 꺼냈다.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미국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국가대표팀에 선발된 마메 바이니(Maame Biney)가 그 주인공이다. 아프리카 가나에서 태어나 버지니아에서 자란 마메는 '아메리칸 드림에 성공한 이민자 가정'이라는 배경으로 유명하다. 은양은 마메가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하기까지 아낌없이 희생한 아버지가 있었다고 전했다. 아버지 크웨쿠 바이니는 1980년대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향했지만 막상 본토에 도착하기까지 4년이 걸렸다.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타고 6개월에 걸쳐 사하라 사막과 지중해를 건넜다.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표값을 모으기 위해 한동안 유럽에 머물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정착해 지금의 아내를 만나 마메를 낳았다. 마메는 다섯 살 때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다. 보라색 스케이트복도 예뻤고, 스케이트도 재미있었지만 지독히 외로웠다. 빙판 위 흑인 선수는 마메뿐이었다. 훈련을 감당할 돈이 넉넉지 않아 친구네 집 지하실에서 살면서 집에서 스케이트장까지 50㎞ 거리를 함께 다녔다. 은양은 다른 학부모보다 먼저 아이스링크에 나가 훈련을 준비하고 코치 역할을 하는 바이니씨에게 한국 부모의 모습이 보였다고 말한다. 이민자여서, 유색인종이라서, 여자라서 혹시나 주눅 들지 않을까 걱정하며 자식 교육에 열성을 다하는 우리네 부모님 말이다.
세 아이는 든든한 지원군이자 원동력
은양에게도 세 아이가 있다. 처음 NBC에 입사했을 때에는 젊은 처자였다. 일을 시작하면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짧은 출산 휴가를 빼고는 한 번도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 새벽 세시면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늘 아이들 자는 모습만 보고 집을 빠져나온다. 아직은 어린 세 아이를 생각하면 때론 마음 한구석이 아리다. 하지만 아이들이 엄마를 자랑스러워하고 엄마의 일을 존중해주기에 결코 후회는 없다.
“일과 가정의 균형이요? 정답은 없어요. 회사에 있을 때는 앵커이고, 집에 돌아가서는 엄마이자 아내이죠. 일하는 엄마의 공통된 숙제가 아닐까 싶어요. 아이들과 보내는 꿀 같은 시간을 희생해 제 커리어를 쌓고, 반대로 가족을 위해 달콤한 승진 기회를 놓치기도 하죠. 제가 내린 결론은 너무 애쓰지 말고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였습니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자만이 살아남아
미국 주요 방송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계 아나운서.기자는 삼십 명 정도. 생각보다 적은 숫자이다. 지원자가 많은데 비해 뽑는 정원이 턱없이 적은데다 알게 모르게 유리천장이 작용하는 탓이다. 여기에 대해 은양은 뻔한 말 같지만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타고난 재능, 외모, 학력, 집안 모두 중요한 요소이지만 결국은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특히나 생방송 뉴스는 매일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만나는 시청자들과의 약속이다. 게으른 사람은 절대 이 약속을 지킬 수 없다. 그러니까 은양이 16년 동안 이 약속을 정확하게 지켜왔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성실한 노력파인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은양 같은 뉴스 앵커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은양이 진심어린 조언을 전했다.
“미국에서 앵커가 되고 싶으시다고요? 발음이 어눌하다면 말하기 연습을 하면 됩니다. 네트워크가 없으면 멘토를 찾거나 사회생활 경험을 늘리세요. 한국계라는 자신의 뿌리를 자랑스러운 자산으로 여기고, 남들과 차별화된 경쟁력이라 생각하세요.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은양은 스스로를 화려하게 성공한 방송인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저 꿈을 향해 정진하다 보니 이 자리까지 오게 됐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을 뿐이다. 기자는 귀를 활짝 열고 주변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겸손한 모모'이다. 은양은 진실만을 말하는 이야기꾼으로서 팔딱팔딱 살아 움직이는 날것의 그대로를 시청자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한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사는 요즘, 앵커가 고급 정보라고 생각한 소식이 대중들에게는 영 공감이 안 되는 생경한 것들일 수 있다. 은양은 뉴스를 출입처 중심이 아니라 대중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려 노력한다. 공감의 촉을 놓지 않으려면 대화와 소통은 필수이다. 그러기 위해 은양은 쉬는 날에도 꾸준히 사람을 만나고 외연을 넓힌다.
기운도 옮는다. 밝고 선한 사람과 한 공간에 있으면 방문만 열어도 밝은 기운이 확 느껴지는 것처럼 은양의 뉴스를 보고 있으면 힘이 난다. 빛을 전하는 은양 특유의 따스함이 브라운관을 뚫고 묻어 나오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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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양(Eun Yang)
1976년 서울에서 출생한 은양은 세살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 이민을 왔다. 메릴랜드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고, 대학 내 케이블 채널 리포터를 시작으로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WUSA 9에서 리포터로 일했다. 2002년부터 NBC4 TV 아침 뉴스 메인 앵커로 워싱턴디시, 버지니아, 메릴랜드 지역민들의 아침을 깨우고 있다.
2013년, 제55회 캐피탈 체사피크 베이 에미상을 수상했고 워싱턴 매거진 선정 ‘DC 로컬 TV뉴스 스타 100인’에 두 차례 선정됐다. 2019년에는 은양이 속한 NBC4 아침 뉴스팀이 미국텔레비전예술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Television Arts and Sciences)가 주는 에미상을 받았고, 다문화 미디어 특파원 협회(Multicultural Media Correspondents Association)가 선정한 ‘2019 방송 저널리스트 상’을 수상했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