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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프면서 경쾌함이 내연주의 매력”가야금니스트 서라미

by 끌로이

“구슬프면서 경쾌함이 내 연주의 매력” 가야금니스트 서라미


'무대 위에서 가야금을 뜯고 공연을 기획하는 평범한 가야금니스트.' 서라미가 자신을 소개하는 말이다. 평범한 가야금니스트는 라디오도 진행한다. 뉴욕 케이 라디오(K-RADIO) 호스트로 프로그램을 맛깔나게 진행하고, 방송국 밖으로 뛰쳐나가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리포터의 역할도 척척 한다. 말로는 평범하다고 하지만, 그의 행보는 여느 가야금 튕기는 국악인과는 조금 다르다. 재주 와 능력이 넘쳐나는 활기찬 소녀를 연상케 한다. 어디까지나 그의 본업은 가야님니스트, 그런데 어쩐지 이 단어가 낯설다. 사전을 찾아봐도 '가야금니스트(Gayakeumist)'라는 단어는 없다. 해외에 진출한 1세대 가야금 연주자로서 자신의 일과 자리를 제대로 표준화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단어다. 피아노 연주자를 피아니스트라 부르고 바이올린 연주자를 바이올리니스트라 부르는데, 가야금을 연주하는 사람이면 응당 가야금니스트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단순한 문제의식에서 탄생한 이름이 한류의 중심에서 세계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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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은 세계인이 감정을 나누는 수단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가야금니스트 서라미의 음악을 들어봤다. 구슬픈 듯 명쾌한 가락이 스피커를 뚫고 나올 것처럼 힘차다. 쉴 새 없이 빠르게 움직이는 열 손가락 사이에 숨은 정교한 여백이 가슴을 울린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락의 맛과 멋이다. 서라미는 가야금이란 만국 공통어이자 감정을 나누는 수단이라고 말한다. 가장 한국적이라 여겼던 우리 악기 가야금이 어떻게 세상사람 누구나 알아듣는 언어라는 걸까?


“이곳 뉴욕에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채색된 것 같아요. 스페인 관객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가야금 연주는 한국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스페인을 떠올리게 한다고. 또 인도 관객은 제 음악에서 인도가 생각난다고도 해요. 신기하죠. 이것이 음악의 힘이 아닐까요? 제가 뉴욕에서 몸소 부딪히며 익힌 문화가 음악으로 표출됐다고 생각해요.”


음악이란 어쩌면 개가 짖고 새가 나는 본성과 같은지도 모르겠다. 거스를 수 없는 본성에 충실하자 오히려 더 밀도 있는 대화가 가능해졌다. 번역기, 통역사 필요 없는 진정한 의미의 소통 말이다. 서라미는 공부하고 연습한다고 이런 것들이 하루아침에 표현되지는 않는다고 강조한다. 수십 년 동안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여러 연주자들과 합을 맞추고, 멜팅 팟의 심장부인 뉴욕에 사는 경험이 녹아든 결과이다.



'안달루시아의 언덕' 가장 사랑해

서라미의 대표곡 '안달루시아의 언덕'은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드러낸다. 가야금을 뜯는다는 표현보다 갖고 논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하프를 연주하는 소리도 난다. 황석영 소설가의 아들이 황호준이 작곡한 곡이다. 우리 민요 선율에 미국의 블루스 음악을 접목해서 전혀 다른 느낌을 낸다. 이 곡에 사용된 스페인 플라멩코는 터키, 아랍음악, 중앙아시아의 음악들과 성질이 비슷하다. 이런 이국적 요소를 한국 장단 위에 얹어 밴드음악으로 새롭게 창작했다. 다양한 민족 음악의 고유 요소의 핵심만을 뽑아내 영리하게 엮은 점이 눈에 띈다. 그런 특징 때문인지 서라미도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안달루시아의 언덕'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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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현 가야금으로 크로스 컬처럴 음악 구현

보통 퓨전이나 크로스 오버라고 하면 다른 문화권의 음악을 이어 붙이는 의미로 이해한다. 여기에 대해 서라미는 크로스 컬처럴(cross cultural)이라 명명한다. 그가 국악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한국음악은 무조건 전통음악으로 통했다. 한국 전통 공연 예술을 깊이 공부하면 할수록 한계에 부딪혔다. 평생 공부한 나도 가끔은 지치는데 한국말은 물론 한국이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국악을 소개할 수 있을까 고민이 깊었다. 그래서 고안한 것이 크로스 컬처럴 음악이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가야금은 12줄이라고 배웠다. 세월이 흐르면서 가야금도 개량을 맞았다. 서라미는 개량된 25현 가야금을 연주한다. 줄이 늘어나자 표현할 수 있는 음역대가 풍부해졌다. 그 어떤 곡이든 자유자재로 화려한 연주가 가능해졌다.



본질을 지키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려 노력

서라미는 시대를 앞서가는 예술가로서 의미 있는 화두를 종종 던진다. 이를테면 전통과 현대 사이의 갈등. 보존과 창작 사이의 갈등 같은 것들. 서라미는 단호하게 “사명감을 갖고 지키려고 노력 중”이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뉴욕에 산다는 이유로, 서양 악기와 접목한 음악을 한다는 이유로 전통을 잃어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지만 기우로 보인다.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굳어진 옛것만 즐긴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관상용 골동품에 가깝지 않을까.


본질을 잃지 않되 대중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기. 이것이 가야금니스트 서라미가 평생 안고 온 숙제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무대가 필요하고, 그 무대를 다음 무대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는 관객의 호응이 절실하다. 재미있었다는 소문이 나야 다른 곳에서도 불러 줄테니 말이다. 그 호응을 위해 서라미는 무대 위에서 열정을 쏟는다. 듣는 재미와 더불어 보는 재미까지 잡도록 퍼포먼스에 신경을 쓰기도 한다. 연주곡마다 새로운 의상을 디자인해서 맞춰 입는다. 매번 새로운 의상, 장신구, 화장을 선보인다. 서라미의 무대를 기대하는 관객들을 위한 최소한의 팬서비스이다. 가야금보다 한국무용을 먼저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서라미는 몸을 쓰는 법을 안다. 음악에 몰입해 자연스럽게 리듬을 탈 때조차 한편의 추상 예술을 떠올리게 한다.


“한국 음식을 알리기 위해 외국인에게 친근한 각종 부침개, 불고기, 잡채를 먼저 준 다음 치즈가 듬뿍 들어간 떡볶이, 김치볶음밥, 김치스파게티로 거부감을 줄이는 것처럼요. 그러다 어느새 치즈 없이 맨 김치를 먹고 싶다는 사람이 생기죠. 저는 한국 전통 문화 예술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어요. 점점 더 우리 음악을 궁금해 하고 관심 가졌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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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음악학 석사 전공하면서 세계 음악에 눈 떠

서라미가 국악의 대중화, 세계화에 목마른 이유가 있다. 2002년 월드컵 공연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날 비행기로 뉴욕에 도착했다. 당초에는 6개월만 머물면서 쉴 요량이었다.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서라미가 뉴욕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어디선가 공연 제의를 해왔고, 그 즈음 헌터칼리지대학원 민족음악학과가 눈에 들어왔다. 국악 외길 인생에서 첫 일탈이었다. 도전은 성공적이다. 그곳에서 신비한 다른 세계의 음악에 눈 뜨고 지금의 '서라미 장르'를 만들어냈다.



맨손으로 뜯는 가야금, 청징함이 매력

멜팅 팟으로 대변되는 뉴욕이지만 한국 음악은 여전히 생소하다. 중국이나 일본 음악은 이미 저변이 넓다. 대중의 기호에 맞게 개량이 수시로 이뤄졌다. 그러나 중국, 일본 악기는 맨손 연주를 하지 않는다. 피크나 스틱 같은 도구를 손에 끼우고 연주한다. 가야금은 맨손으로 현을 뜯는다. 때문에 소리의 깊이가 다르다. 눈과 귀가 예민한 관객들은 바로 알아챈다. 맨손 연주 특유의 울림을 높게 평가한다. 가녀린 음이 애처러우면서도 청징하다고 말한다.


아직까지 미국 학교에는 전공과목에 가야금이 없다. 전문 가야금니스트를 양성하지 못하다 보니 때때로 벽에 가로막하기도 한다. 서라미는 가야금이 필요하다고 부르는 자리는 어디든 달려간다. 굵직한 자리뿐만 아니라 대학 교실, 재즈 카페 같은 작은 자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인의 체면보다 가야금을 널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험난한 길을 홀로 걸어가자니 서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야금 연주와 가르침에 열중하는 이유는 때때로 전해지는 관객들의 진심 덕분이다.


“12년 전부터 선교 여행을 다니고 있어요. 한국을 잘 알지 못하는 오지 국가에서 가야금을 연주해요. 그들은 처음 듣는 생소한 가락이지요. 눈물을 흘리는 관객들이 있었어요. 공연을 보고 나서 새로운 꿈과 목표가 생겼다고 말하는 관객도 있었어요. 연주자로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죠. 감정이 복받쳐서 연주하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해요.”



비영리단체 이끌며 사회 공헌에 주력

서라미는 '함께'의 힘을 믿는다. 외로운 길을 벗들과 함께 걷기로 했다. 재미나이 가야금 앙상블(GemiNY-Gayakeum Music Ensemble in NewYork)을 만들어 2007년부터 꾸준히 무료 연주회를 열고 있다. 재미나이는 한국에서 온 프로 연주자들, 한인 이민 1세대부터 2, 3세로 구성된 미주 최초 그룹이다. 매번 다른 주제를 제시하고 관객들의 보내온 사연으로 무대를 꾸미는 일종의 관객참여형 잔치이다. 뉴욕연합 국악찬양팀 세븐헤븐(Seven Heaven)도 이끌고 있다. 2009년 7명으로 시작한 세븐헤븐은 24명까지 식구가 늘었다. 모두 비영리단체이다. 재능기부 내지는 사회 공헌 성격이 짙다. 그가 이렇게 바쁜 일정을 쪼개 누군가를 돕는 행동에 열심인 이유는 그 또한 어려운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상 집안의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어요. 대학원과정을 겨우겨우 마칠 때쯤부터 시작된 그 다음 10년. 제 인생에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때이기도 하지만 가장 잘 산 10년이기도 합니다. 그때의 경험은 저에게 값진 보물과도 같아요. 제가 가진 재능으로 사회의 또 다른 어려운 이들을 돕고 꿈을 줄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보람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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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대에 우리 문화를 전수하는 일이 내 사명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겨우내 부지런히 땔감을 준비했다가 봄이 되면 나들이 갈 계획을 만들듯이. 그렇게 때를 기다리면서 혹독한 겨울을 함께 견뎌보자고 다독인다. 다음 세대에 우리의 문화를 잘 전수하는 일 역시 그의 역할 중 하나이다. 그래서 꾸준히 다음 세대를 발굴 육성하는데 공을 들이고 있다. 단순한 가야금 선생님을 넘어서 전통 지킴이로서 대물림을 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혼자서는 손부채에 불과하지만 힘을 모아 선한 목적을 이끄는 삶을 살다보면 강풍을 만들 수 있다. 아직까지는 미풍과 약풍 어디쯤이다. 힘이 모여 드디어 강풍에 도달했을 때에는 그의 바람대로 뉴욕에 국악학교가 세워져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올해 첫 앨범 발매, 월드투어 계획도

서라미는 올해 그 꿈에 한 발짝 다가선다. 10년 전부터 준비한 첫 앨범이 드디어 세상에 나온다. 이미 녹음을 마쳤고 곧 발매를 앞두고 있다. 개인 앨범과 더불어 재미나이 음원도 발매된다. 해외에서 한국 전통 문화 예술을 배우는 다음 세대들에게 아름다운 도전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면 잔뜩 상기된 표정이다.


지난해 '한류 열기: 돌아오라!(Korean Fever: Returns!)’ 주제로 프로젝트 그룹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고, 올해는 월드투어가 예정돼 있다. 제일 먼저 고국에서 새 앨범을 소개하는데 이어 동아시아, 남아프리카, 유럽을 차례로 돌면서 대장정을 소화한다. 그 와중에 매일 꼬박꼬박 정해진 시간에 라디오 청취자들과 만난다. 올해는 그가 맡은 라디오 프로그램이 하나 더 늘었다. 연습과 공연 기획만으로도 하루가 꽉 차는데 생방송 라디오 진행까지. 이 에너지가 어디서 샘솟는 걸까? 서라미는 소리로 마음을 전달하는 본질은 같다면서 앞으로도 라디오와 가야금을 병행하면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겠다고 말한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한국 전통 문화 예술 명맥을 잇는다는 것은 운명이 아닌 사명이에요.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과 인내를 요구하지만, 노력의 대가는 100년 뒤에 아름답게 빛날 것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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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미 가야금니스트

국립국악중학교(전액국비장학생)를 거쳐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를 3 년간 성음 장학생으로 다녔고, 대학재학 중 중국연변으로 유학했다. 중앙대 한국음악학과를 음대 전체, 단대 전체수석으로 졸업하였다. 뉴욕으로 건너와 헌터 칼리지(Hunter College) 대학원에서 민족음악학과(Ethnomusicology) M.A. 졸업 예정이다. 한국인 최초로 메트로폴리탄박물관내 연주, 스미소니언박물관, 재즈의 전당 블루노트, 스몰스에서 연주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유엔, 각국 대사관, 백악관, 카네기홀, 링컨센터, 케네디센터 등 최고의 연주홀에서 독주와 협연을 하였다. 재즈링컨센터에서 첫 번째 한국인 기획자&연주자로 동시 기록을 세웠다.

또한 뉴욕에서 [FM87.7 뉴욕라디오코리아]의 대표 진행자로서 각종 국가행사와 콘서트 등에 전문사회자(MC) 로 활동하였고, 현재 [K - Radio AM1660] 진행자로 생방송 '서라미의 라디오홀릭', '서라미의 인생의 품격'을 진행하고 있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2020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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