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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y 22. 2020

'연기하듯 연주하는 감성 연주자',바이올리니스트 이유진

'연기하듯 연주하는 감성 연주자', 바이올리니스트 이유진 


힘차게 활의 노를 저어 바흐의 협곡을 지나고, 슈만의 강을 건너 모차르트의 오솔길을 걷는 동안 3살 꼬마는 숙녀가 되었다. 훌쩍 자라는 사이 손끝에는 영광스러운 아티스트의 훈장이 문신처럼 새겨졌다. 활을 켜는 오른손, 현을 잡는 왼손은 각자의 쓰임새만큼이나 서로 다르게 발달했다. 한 사람의 손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두 손은 다르게 생겼다. 바이올린과 함께 한 20년 시간이 숙녀에게 굳은살과 흑연 자국, 서로 다른 손가락 길이를 선물했다. 몸의 흔적과 더불어 음악을 해석하는 눈도 한결 깊어졌다. 2018 워싱턴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위와 청중상을 동시에 거머쥔 차세대 바이올리니스트 이유진을 만나본다.  




무대 위에서 연주자는 물러설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정직하게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연주자의 소리가 공기를 떠다니는 무형의 음원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지배하는 유형의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유진의 바이올린 연주에서 깨달았다. 분명 바르고 정확한 연주임에 틀림이 없는데 희한하게도 그 안에 사랑이 전해진다.   


“저에게 음악이란 삶과 언어입니다. 기쁨, 슬픔, 사랑 등 삶을 살면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이 음악에 녹아있다고 생각해요. 삶의 굴곡이 담긴 음악을 하고 싶어요. 말을 하듯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싶어요.”  


23살 앳된 숙녀의 모습과는 달리 유진이 말하는 음악 이야기는 한층 농익어 있다. 곡을 만드는 작곡가는 그들이 겪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음표로 표현한다. 그 안에 사랑에 대한 설렘, 그리움, 슬픔, 원망 등 다양한 굴곡이 담겼다. 그런 인생이 예술적 영감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위대한 음악을 창조할 수 있었다. 유진은 이렇게 작곡가가 곡을 만들었을 당시의 감정과 시대 배경을 상상하면서 차분하게 음악을 해석한다. 악보를 꼼꼼하게 분석한 후 내 것으로 만들어 소화한다. 유진은 원곡의 의도와 감정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연주를 마친 자리에 유진도 사라지고, 바이올린도 사라지고 결국 작곡가의 여운만이 진하게 남는 것. 그래서 관객들이 '이유진 연주가 좋다'고 말하는 것보다 '브람스, 그 작곡가의 곡이 좋다'고 평하는 것을 즐긴다.   


국제콩쿠르는 세계무대로 나가려는 젊은 음악가들의 등용문 구실을 한다. 유진이 미국으로 간지 3년만인 2013년, 클라인 국제 음악 콩쿠르 1위를 했고, 스툴버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는 1위와 함께 바흐 특별상을 받아 국제무대에 눈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2018년에는 워싱턴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1위와 청중상을 차지했다. 콩쿠르 입상은 심사위원들의 선호도와 성향이 크게 좌우하기 때문에 최고의 컨디션으로 최상의 연주 실력을 아낌없이 다 보여주는 노력이 중요하다.  특히 관객들이 직접 뽑는 청중상을 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관객과 깊이 교감했다는 의미이다.  


“무대는 항상 떨려요. 꽤 오래 전 어떤 콩쿠르 무대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몰입을 과하게 했나봐요. 연주 중에 줄을 끊어뜨린 적이 있어요. 실수는 욕심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해요. 욕심과 긴장을 모두 내려놓고 자유롭게 음악에만 모든 것을 맡기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콩쿠르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무대에 설 기회가 많아졌다. 유진은 작년 12월, 워싱턴한국문화원이 주최한 '영 아티스트 송년음악회' 무대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다. 앙코르 곡으로 한국과 관련된 곡을 주문받았다. 고민 끝에 아리랑을 선곡하고 학교 친구에게 피아노 트리오 버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전통 클래식 위주로 연주해온지라 작곡가에게 직접 곡 해설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바흐나 모차르트는 이미 수백 년 전 유명을 달리한 인물들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친구는 유진의 성격까지 꼼꼼하게 아리랑 작곡에 반영해 이번 무대를 위한 곡을 탄생시켰다. 작곡가와 이렇게 자세하게 제작 의도, 곡의 느낌을 의논한 적은 처음이다.  


“흥미로운 작업이었어요. 친한 친구가 쓴 곡을 연주하니까 느낌이 이상했어요. 굉장히 새롭고 신선했죠. 곡속에 제가 들어있는 점도 좋았고, 친구의 마음을 말과 글이 아닌 곡으로 전달받는 느낌도 좋았어요.”    


유진은 한국에서 예원학교를 다니다 미국으로 건너왔다. 콜번학교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고 커티스음악원에 들어갔다. 커티스음악원은  미국 종합대학, 미술대, 음악대를 포함한 모든 고등교육기관중 입학 경쟁률이 가장 높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모든 재학생들에게 전액 장학금을 주는 운영 방식으로 그 해에 졸업하는 학생의 수만큼만 신입생을 제한적으로 선발한다. 전교생 수는 170명. 이 숫자는 한 개의 오케스트라나 오페라단을 꾸릴 수 있는 수이다. 소수정예의 인재들만 골라 학생과 교수의 간격을 좁힌 음악교육이 특징이다. 이곳에 다니고 있는 한국인 학생은 21명, 유진과 같이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한국인 학생은 8명 정도이다.   


유진은 이곳에서 바이올린 거장 아이다 카바피안 선생님과 공부하고 있다. '연주하면서 배운다'는 학교 이념으로 거의 매일 교수·학생 음악회가 열린다. 크고 작은 연주 기회를 자주 갖다 보니 자연스럽게 무대 공포증이 사라졌다. 바이올린 연주자에게 있어 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연주 여행은 그 자체가 고도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의자에 앉아 연주하는 피아노나 첼로와 달리 바이올린 독주는 서서 활을 켠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9번 '크로이처'의 경우 연주 시간이 40분 가까이 걸리는 대곡이다. 체력 소모가 클 수밖에 없다. 체력이 좋아지면 고통에 대한 저항력이 강해진다. 집중력이 좋아지고 호흡이 길어져 표현력이 높아진다. 짜증이 늘고 귀찮아지는 것은 몸과 마음이 지쳐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체력이 약해서이기도 하다.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되거든 체력을 길러라. 게으름, 나태, 권태, 짜증, 우울, 분노 모두 체력이 버티지 못해 정신이 몸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증상이야.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데미지를 입은 후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늦는 이유 모두 체력이 약하기 때문이다.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리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네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 돼.” - 윤태호 웹툰 '미생' 중 



유진은 하루 3시간 이상 바이올린 연습과 더불어 1시간 이상 꼭 운동을 한다. 자신이 가진 체력 총량을 늘리기 위해서다. 어렸을 때에는 하루 8시간이 넘게 바이올린을 켰다. 하지만 이제는 연습량보다는 너비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어릴 때는 연습에 많이 의존했어요. 커가면서는 점점 삶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물론 연습도 중요하지만 음악을 진정으로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음악 외에 문학, 시, 언어 같은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요즘 무슨 음악을 듣느냐고 물어봤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바흐, 슈만, 모차르트를 꼽는다.  


“슈만의 곡은 달콤한 복숭아 같아요. 한입 베어불면 꿀 같은 과즙이 톡 터지는 느낌이에요. 연인을 기다릴 때의 설렘이랄까요. 그런 아기자기함이 느껴지죠. 모차르트 곡은 재미있어요. 해학적인 와중에 천재성이 있어서 반전 매력을 줍니다. 바흐는 클래식의 정수이지요. 기본이 주는 순수한 매력이 있어요. 깨끗한 곡이 주는 묵직한 감동이 좋아요.” 


유진에게 슈만과 바흐, 모차르트는 이미 고인이 아닌듯했다. 그 누구보다 생생히 살아 신성한 음악 여정을 함께 걷는 동반자들이었다. 오래오래 청중들과 아름다운 선율을 나누는 것. 유진이 바라는 꿈이다. 굳이 나누자면 연주자는 크리에이터가 아니라 리크리에이터에 가깝다. 곡을 만든 작곡가가 크리에이터, 연주자는 그들이 악보에 꽁꽁 숨겨놓은 매력을 대중에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미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곡들이라 2020년, 현재를 살고 있는 유진과는 간극이 크다. 그 틈을 최대한 유연하게 채워보려 노력한다.  


세대를 거듭하는 동안 시대는 조금씩 바뀐다. 어찌 보면 거대한 틀 안에서 차근차근 원을 그리며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대흐름 속에서 유진은 클래식 음악의 정통성과 창조성에 대한 고민이 깊다.  


“봉준호 감독이 이런 말을 했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고. 저도 이제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아 그대로 모방하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이제는 저만의 색을 찾고 싶어요. 아마도 꽤 긴 시간 고민이 계속되겠죠. 그동안 서서히 제 고유의 색이 빛을 발하리라 믿습니다.”  


유진은 지금 커티스음악원에서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다. 내년이 되면 유진에게 또 다른 이력이 생긴다. 유럽에서 공부를 더 할지, 미국에 계속 남을지 아직 정해놓은 길은 없다. 다만 음악 목표는 확실하다.  유진이 갓 미국에 왔을 당시 이작 펄만(Itzak Perlman) 뮤직 프로그램에 영재 장학생으로 뽑혀 수업을 받았다. 현존하는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손꼽히는 대선배를 마주하고선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고 막연하게 꿈꿨었다. 그러나 요즘은 누구처럼 되고 싶다기 보다는 자신을 기준의 잣대로 둔다. 재능을 깎고 다듬어 좋은 무대를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기를. 왠지 머지않아 유진의 담담한 소원이 현실이 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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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진 바이올리니스트 

서울예원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콜번학교를 졸업했으며, 현재 커티스 음악원(아이다 카바피안, 파멜라 프랑크 사사)에 재학 중이다. 


2018 요제프 요하임(하노버) 국제콩쿠르 입상 

2018 워싱턴 국제 음악 콩쿠르 1 위 및 청중상 

2018 서울 국제음악 콩쿠르 2 위 

2017 무네츠쿠 바이올린 국제 콩쿠르 4 위 

2016 경기 영아티스트 선정 

2016 메뉴힌 바이올린 국제콩쿠르 세미 파이널리스트 

2015 무네츠쿠 바이올린 국제콩쿠르 3 위 

2013 스툴버그 국제 음악 콩쿠르 1 위 

2013 바흐 특별상·클라인 국제 음악 콩쿠르 1위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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