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에서 12년 장기 근속한 유일한 한국계 박정준
'성공한 사람보다는 가치 있는 사람이 돼라'
아마존에서 12년 장기 근속한 유일한 한국계 박정준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 사이에서 우리는 늘 방황을 거듭한다. 주변의 기대와 나의 자존 사이에서 무수히 갈등하다 결국은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안주하고 만다. 시간이 흐른 뒤, 이 사람은 후회 없이 행복했었다고 회고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직원이 평균 1년 남짓만 일하고 떠난다는 아마존에서 12년 동안 근무하며 얼떨결에 근속 연수 상위 2% 사원이 된 박정준. 온라인 서점으로 출발한 아마존이 세계 최대 규모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목도한 유일한 한국계이기도 하다. 아마조니언으로 생활한 12년 동안 그가 얻은 것은 화려한 경력도, 안정적인 연봉도 아니었다. 나만의 경쟁력을 찾고,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실행할 용기를 얻었다. 아마존에서의 경험을 발판삼아 그는 지금 1인 기업 '이지온 글로벌(Ezion Global, Inc)’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또 다른 주식회사 '샤인플로우(Shineflow, Inc.)' 법인 등록을 마치고 한껏 보폭을 넓혔다. 박정준 대표는 요즘 진정 행복하다고 말한다.
2015년 퇴사 때 가장 오래 근무한 한국계 직원으로 기록
대화는 '아마존에서 12년이나 버티다 왜 나왔나?'로 시작했다. 그가 입사했던 2004년은 닷컴버블 사태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아마존이 단순한 전자상거래 사이트가 아닌 소프트웨어 회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재도약을 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컴퓨터공학과 졸업생들에게는 마이크로소프트가 선망의 직장이었다. 박정준 역시 마이크로소프트에 지원했다가 면접에서 탈락하고, 마침 아마존에 다니고 있던 일본인 친구 추천으로 아마존 면접 기회를 얻었다. 입사 과정은 생각보다 순탄했다. 그를 놓고 면접관 다섯 명이 돌아가며 한 시간씩 까다로운 문제를 쏟아냈다.
5시간 면접 통과하고 입사
개발자를 뽑는 면접은 대화 방식이 아니라 흡사 수학경시대회와 같다. 퍼즐이나 코딩 관련 문제를 낸다. 잘 풀었더라도 과정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낭패다. 똑똑하더라도 대화 기술이 부족하거나 생각이 창의적이지 않으면 뽑지 않는다. 생선살을 발라내듯 면접자를 완전히 해체한 후, 그 자리에서 시원하게 답을 줬다. “내가 졌어(You beat me).” 진 빠지는 다섯 시간짜리 압박면접을 통과하고 나니 아마존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12년 동안 힘들어도 버틴 이유는 아마존으로 와야 했던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학부를 졸업하고 스물세 살에 입사한 첫 직장이 아마존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디를 가나 직장은 다 똑같이 힘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알고 보니 아마존이 좀 더 경쟁적이고 근무하기 힘든 곳이었어요. 승진을 목표로 일하기도 하고 개발자로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하며 변화를 주기도 했는데 7년 차에 한계가 왔어요. 그러다 생각을 바꾸기로 했죠. 회사가 목표가 아닌 과정이라고 관점을 바꾸니 오히려 장기적으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죠.”
그가 아마존에 입사했을 당시만 해도 한국계 직원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영어보다 한국말이 더 편한 직원은 12명 정도가 전부여서 '케이 런치(K-lunch)' 모임을 만들어 수요일마다 점심을 같이 먹었다. 그 사이 회사 몸집이 커진 만큼 직원 구성도 다양해졌다. 지금은 한국계 직원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다.
아마존은 수시로 선수 교체하는 아이스하키 같아
아마존이 일하는 방식을 흔히 아이스하키와 비교하곤 한다. 선수들은 링크 위를 시종일관 전력질주로 누빈다. 당연히 체력소모가 상당하다. 때문에 아이스하키는 수시로 선수교체를 한다. 선수 교체는 경기 중 언제든지 횟수 제한 없이 가능하다. 심판에게 알리거나 경기를 굳이 중단시키지도 않는다. 체력이 다한 선수, 또는 경기력이 기대에 못 미치는 선수는 즉각 빠지고 새 선수가 자연스럽게 채워진다. 짧고 굵게 전력을 다하고 빠지는 시스템, 박정준은 아마존 환경은 아이스하키와 비슷했다고 말한다. 아마존은 효율성과 생산성을 굉장히 중시하고 또 사원수준도 상향평준화 되어있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냥 열심히 하는 수준이 아니라 뛰어나게 잘해야만 한다.
회사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 과정
그가 아마존에서 근무하는 동안 세 아이가 태어났다. 단 한 번도 유급 육아휴직을 받지 못했다. 첫째가 태어났을 때 충분한 휴가 없이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둘째 때는 무급으로 석 달을 휴직했다. 그리고 셋째가 태어난 해에 회사를 완전히 나왔다. 아이들과 시간을 충분히 보내기 위해서 였다. 아마존이 워라밸(work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이 좋은 일터는 아니었다. 제프 베조스 회장 특유의 달달볶는 경영 방식과 혹독한 경쟁 체제가 직원들을 쉽게 지치게 만들었다. 박정준이 아마존을 나올 무렵, 뉴욕타임즈에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공포의 직장 아마존닷컴, 직원들 무자비한 생존 경쟁에 시달려'. 언론이 한번 두드려준 뒤에야 조금 나아졌다. 여기에 대해 박정준은 ‘워라밸’이라는 단어 자체가 슬프다고 말한다. 일은 삶이 아니라는 전제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대신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회사의 시간도 자신이 선택한 삶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워라밸’이라고 말이다.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의미의 워라밸은 일하는 시간은 삶으로 보지 않고 칼퇴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를 목표가 아닌 과정으로 보는 거예요. 회사에 소속된 시간동안 도제(徒弟)의 마음으로 열심히 일하고 배우면서 독립 후의 삶을 계획하는 거죠. 평생 영주 밑에서 일해야 하는 농노와 마스터로의 과정 속에 장인 밑에서 일하는 도제는 정말 큰 차이가 있으니까요.”
나는 아마존에서 대체 불가한 사원이 아니었다
끝까지 버텨야 할 곳으로 생각하면 아침마다 출근길이 고역이다. 하지만 여기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워서 내 길을 개척하리라 마음먹으면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그가 모든 선택권을 쥐고 있다고 자각한 순간 역설적으로 회사에 남을 수 있는 힘이 솟았다. 덕분에 사표와 이직이 일상인 곳에서 12년을 생활하면서 아마존이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나란히 IT업계 최고로 커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이 경험으로 그가 얻은 진리는 ‘나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가치를 높이자'였다. 개발자로 일할 때에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개발이 좋은 성과를 내기도 했고, 사내 클라우드 컴퓨팅 스타트업 공모전에서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할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하지만 도제의 마음을 갖고부터는 개발자의 역할을 내려놓고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마케팅 경영분석가, 비즈니스 인텔리전스 전문가 등 경영 분야 5개 직종을 두루 거치면서 독립을 준비했다.
'세 아이 아빠', '한국말'이 나의 가장 큰 경쟁력
머릿속에 부유하는 생각들을 도형으로 그러보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무엇이 남들보다 뛰어난지. '한국말’ ‘비즈니스’ ‘세 아이의 아빠’ ‘아마조니언’. 넷의 교집합과 나를 연결하고 보니 한국산 유아용 놀이 매트 사업이 보였다. 한국 가정에는 필수이지만 미국에는 생소한 제품이다. 미국은 신발을 신은 채 소파, 침대, 식탁에서 생활을 하는 문화이기 때문에 바닥에 아이를 두지 않는다. 실제로 미국에서 5세 미만 아이가 응급실에 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낙상 사고이다. 여기에 착안해 한국 제조사로부터 미국 아마존 독점 판매권을 따내고 미국 시장에 맞게 디자인을 바꿨다. 매트의 본질은 '아이가 다치지 않게 보호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넘어져도 괜찮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결국 보호를 통해 삶에 대한 모험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든 매트 홍보 문구가 '모든 모험은 안전한 땅에서부터 시작된다.(Every adventure strarts from the safe ground)'이다.
아마존다운 독립을 이루다
매트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때가 둘째가 태어나던 2010년이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마켓플레이스 서비스 사업으로 투잡을 뛴 셈이다. 이 때 설립한 회사를 솔로몬 왕 시절의 최대 무역도시인 이지온 게벨(Ezion Geber)의 이름을 따서 이지온 글로벌 주식회사로 지었다. 그가 판매하는 유아용 매트는 아마존에서 최초로 출시한 한국식 놀이방 매트이자 현재까지 누적판매량과 상품평이 가장 높은 제품이다. 제품이 인기를 끌자 아마존에 예전에 없던 '유아용 매트’ 카테고리가 새로 생겼다. 이 회사는 코트라의 북미 온라인 시장 관련 보고서에 우수 기업 사례로 소개되기도 했다. .
그리고 올해부터는 한국의 좋은 상품을 아마존에 더 많이 소개하기 위한 컨설팅·에이전시 회사 샤인플로우를 운영한다. 현재 아마존에서 판매하고 있는 유아용 놀이 매트와 뷰티 커머스 플랫폼 미미박스를 첫 모델로 했다.
“제가 해온 아마존 판매에 한국 업체의 관심이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내수는 물론 중국과 일본과 같은 인근 나라에서의 매출도 많이 줄어든 기업들이 대부분이었죠. 그러다보니 미국, 특히 아마존을 통해서 활로를 찾고 싶어 하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아마존에서 판매를 높일 수 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내 경험과 지식이 한국과 미국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면 당연히 해야죠.”
야생 정글인 아마존에서 많은 아마조니언들이 반항과 투항을 반복하며 길들여진다. 일부는 생존 경쟁에서 도태된다. 그 먹이사슬에서 박정준은 유유히 자신만의 생태계를 만들어 아마존을 사업 파트너로 이용했다.
앞으로 직인·장인으로서의 삶도 기록하고파
아마존이 제공하는 익숙한 소속감을 박차고 스스로 울타리 밖 정글에 뛰어든 지금, 그는 언제 잡아먹힐지 모르는 불안감을 늘 안고 산다. 그렇지만 독립 이후 이룬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훨씬 더 값지다. 아마존에서 도제로서 보낸 12년 삶을 담백하게 책으로 냈다. 그는 이만큼 오래 다닌 한국계 직원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명감을 갖고 집필을 시작했다면서, 이 일을 자기보다 잘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책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 말한다. 첫 번째 책이 도제로서의 경험담이라면 앞으로 나올 책은 스승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독립된 생을 사는 직인(職人), 즉 저니맨(journeyman)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또 죽기 전에 비즈니스 마스터가 된다면 장인(匠人)의 자격으로 세 번째 책을 쓸 것이다. 아직은 계획일 뿐이다. 정말로 쓰게 될지 계획이 어그러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런 기분 좋은 상상이 오늘도 그의 하루에 상쾌한 훈풍을 불어넣고 있다.
독자 스스로 자신의 가치 찾기를
그가 유독 책에 애착을 보이는 이유가 뭘까? 그는 매일 읽고 기록하는 일이 습관인 사람처럼 보인다. 그는 편식하지 않는 다독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 취사를 권유한다. 빌 게이츠는 부자 되는 법 같은 책을 읽을 리가 없다. 건강하게 날씬한 사람이 다이어트 책을 읽을 리가 없다. 사람들은 주로 무언가 정보를 찾을 때 책을 집어 들게 되는데, 그 역시 그랬다. 아이가 태어날 때 육아서를 샀고, 지금은 생전 관심두지 않았던 경영지침서를 들추고 있다. 그가 쓴 책 '나는 아마존에서 미래를 다녔다'를 읽는 독자들도 글로벌기업, 해외취업, 시가 총액 세계 1위라는 키워드에 끌렸을 것이다.
그가 책을 쓴 진짜 이유는 사람들을 아마존 사원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아마존의 성공 원리를 거울삼아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찾기를 바라는 따뜻한 당부이다.
“저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표입니다. 집필은 제가 아마존을 다닌 한국인이었기 때문에 특별하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 중이라면 책에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훔쳐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미래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해줄 말이 있냐고 묻자 그는 자신보다 뛰어난 인재가 훨씬 많기 때문에 어떤 조언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겸손하게 답했다. 그러면서 훈수 두는 말 대신 책 세권을 추천했다. 정신과 의사 모건 스콧 펙이 심리 치료 현장에서 만난 환자들의 사레를 소개하고 건강한 삶을 향한 진화 과정을 이야기하는 책 '아직도 가야 할 길', 지그 지글러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의 판매 경험과 인간 계발 경험을 살려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는 최고 전문가들의 성공 철학을 파악한 뒤 쓴 책 '정상에서 만납시다', 그리고 깊고, 맑고, 거침없는 언어로 삶의 보편적 화두를 관통하는 칼릴 지브란의 잠언 시집 '예언자'를 추천했다.
“당신이 지금 인생의 어느 시점에 있든지 당신 자신이 가야 할 독특하고 설레는 삶의 여정에 작은 도움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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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준 대표
미국 워싱턴대학교(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아마존닷컴 시애틀 본사에서 일했다. 개발자, 경영분석가 등 5개 직종 8개 부서를 경험했다. 직원 대상의 클라우드 컴퓨팅 스타트업 공모전에서 우승, 사내 게임대회 준우승 이력이 있다. 아마존에서 보고 배운 원리들과 아마존의 플랫폼을 활용해 2015년에 독립했고, 현재 이지온 글로벌(Ezion Global, Inc)과 샤인플로우(Shineflow, Inc.) 두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이지온 글로벌은 코트라 북미 온라인 시장 관련 보고서에 우수 기업 사례로 소개되었다.
아마존에서 겪었던 12년 동안의 기억을 책 ‘나는 아마존에서 미래를 다녔다(출판: 한빛비즈)'에 담아 출간했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2020년 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