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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May 22. 2020

독일 오페라 주인공 뉴욕에 입성하다,  테너 전주은

독일 오페라 주인공 뉴욕에 입성하다

그리츠 오페라 '마술피리' 타미노로 데뷔

드라마틱한 목소리로 독일을 감동시킨 테너 전주은 



인종과 공간을 넘어 누구에게나 통하는 언어는 음악이다. 음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이다. 좁고 어두운 동굴을 건너고 있는 이 시기에 예술이 주는 힘은 위대하다. 아름다움 앞에서는 그것이 사랑이든 신이든 자연이든, 우리는 할 말을 잃지 않는가. 감동 앞에서 입은 침묵하고 만다. 음악이 없다면 황폐한 영혼을 무엇으로 달래야 할까.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예술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진하게 와 닿는 요즘, 자기 자리에서 맡은바 본업에 충실하며 말없이 우리를 다독이는 성악가가 있다. 독일 오페라극장에서 주인공 역을 맡아 독일인에게 큰 감동을 준 오페라 가수 전주은이다. 그가 뉴욕에서의 활동을 위해 미국에 왔다. 테너이자 오페라 가수로 관객들에게 최상의 ‘귀르가즘'을 선사하던 전주은. 그가 들려주는 독일에서의 활동상과 뉴욕무대를 준비하는 각오는 감동과 희망을 선사한다.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보자. 



이야기가 담긴 노래로 울림 전해 

무대 위에서 가수는 자신의 진리를 주장하거나 그 진정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그냥 말없이 연주한 뒤 무대에서 사라진다. 음악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가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 인간의 감정과 삶 그리고 그 너머의 세계까지 느끼게 하기 때문에 감동으로 고양된다. 어떤 형태의 감동일지는 가수의 역량에 따라 달라진다. 전주은의 노래에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기쁨과 즐거움, 괴로움, 슬픔이 오색찬란하게 펼쳐진다. 그래서인지 그의 노래를 듣노라면 정찬 후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챙겨먹은 듯한 포만감이 든다. 


단숨에 독일 오페라 무대 주역으로 데뷔 

전주은은 한국에서 공부를 마친 뒤 곧장 독일로 건너가 드레스덴 국립음악대학교에서 학사, 석사, 최고연주자과정까지 졸업했다. 리트라 불리는 예술가곡과 오라토리오, 오페라를 체계적으로 배웠다. 마스터 과정을 거의 마칠 무렵 프로페셔널 오페라 가수의 길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오스트리아 그라츠에 있는 그라츠 오페라(Graz Opera)에서 모차르트의 작품 마술피리(Die Zauberflöte)에서 남자 주인공 타미노(Tamino)역으로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이후 오랜 시간 독일 오페라 무대 주역 가수로 무대에 섰다. 클래식의 본고장인 유럽에서 동양인이 주역으로 발탁되는 일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프로페셔널 무대 경험이 없는 학생이 곧바로 주인공으로 데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지 언론은 전주은에 대해 드라마틱한 소리를 내는 테너라고 극찬했다. 


“그라츠 오페라는 오스트리아에서 빈 국립극장(Wiener Staatsoper) 다음으로 규모가 있는 극장인데 저 같은 신인이 바로 주인공으로 데뷔하다니 믿기 힘들었죠. 당시 그라츠 오페라 공연 책임자가 말했죠. 다음 시즌에 마술피리와 베르테르 중 어떤 작품을 할까 고민 중인데 당신이 타미노를 맡아준다면 마술피리로 다음 시즌 작품을 결정하겠다고.”   


세계적 전설이 공연했던 그라츠 극장에서 마술피리 타미노 역으로 데뷔  

데뷔 무대가 강렬해서 이었을까. 전주은은 아직도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마술피리 첫 공연이었다고 회상한다. 그가 처음 선 그라츠 오페라는 루치아노 파바로티, 프랑코 코렐리, 카를로 베르곤지, 레오 누치 같은 전설들이 공연했던 자리이다. 그라츠 오페라에서 하는 공연들은 작품 주제를 막론하고 늘 매진이다. 이렇게 영광스러운 자리에 주역 가수로 서서 관객과 만나는 일은 매일이 기쁨과 환희의 연속이었다.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은 그가 옷을 갈아입고 분장을 지우고 나오기를 기다리셨다가 같이 사진을 찍는다. 극장으로 팬레터를 보내는 관객도 있다. 그가 작품을 바꿀 때마다 공연을 관람하고 그의 다음 작품까지도 미리 알고 이야기를 걸어오는 팬까지 생겼다. 관심과 응원을 받는다 생각하니 절로 힘이 솟았다.  


오스트리아에서 전주은은 그라츠 오페라를 중심으로 다수의 오페라 공연과 콘서트 공연 그리고 세계적인 콘서트 하우스인 빈 콘체르트하우스(Wiener Konzerthaus)에서 독창자로 공연했다. 당겨진 활시위 같은 몸으로 비옥한 목소리를 뽑아냈던 귀중한 시간이었다. 이후 다시 독일로 무대를 옮겨 튀링엔 극장(Philharmonie und Theater Thüringen)에서 극장 전속 주역가수로 활동하며 여러 오페라를 경험했다.  


독일 튀링겐 극장에서 이탈리안 싱어 역할이 가장 기억에 남아

그는 튀링겐 극장에서 가장 오래 노래했다. 장미의 기사에서 극중 이탈리안 싱어 역할을 맡았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독일어도 어려운데 이탈리아어로 부르는 아리아는 너무 어려웠다. 배역을 맡자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3개월 동안 매일 연습했다. 심지어 휴가 기간을 이용해 이탈리아로 달려가 음악 코치와 발성 선생님들을 찾아다녔다. 곡의 해석부터 시작해 이태리 현지에서만 배울 수 있는 예민한 발음이나 음악적인 표현 등을 습득하며 준비했다. 전주은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가장 컸던 때였다고 회상한다. 그때 익힌 탄탄한 기본기 덕분에 한국 예술의 전당 오라토리오 데뷔 무대에도 오를 수 있었다


"2009년 서울 오라토리오 정기 연주회로 하이든 서거 200주년을 기념한 천지창조 공연이 있었어요. 영광스럽게도 당시 제가 테너 솔리스트 유리엘 역으로 초청받았습니다. 저에게는 오라토리오 데뷔 무대이자 한국 무대 첫 데뷔인 셈이었습니다. 예술의전당 콘서트 홀에서 성공적인 데뷔무대를 장식할 수 있었던 건 독일, 이탈리아에서 오라토리오를 탄탄하게 배웠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익힐 땐 힘들었지만 그만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때 받은 감동은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치열한 경쟁 과정은 매일이 도전의 연속 

우리가 흔히 아는 남자 성악가의 음역대는 테너, 바리톤, 베이스 정도가 전부이다. 남자 가수의 높은음자리표에 해당하는 테너 중에도 보이스타입이 세부적으로 나뉜다. 가벼운 소리에 기교있는 노래를 주로 하는 레제로 테너(tenore leggiero)부터 호소력 짙은 소리로 드라마틱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는 드라마틱테너(tenore drammatico)까지 6타입 이상으로 나눈다. 극장에서 가수의 소리에 맞는 배역을 제안하고 오페라에서는 제 소리에 어울리는 역할들을 주로 맡는다.  


전주은 이름 석 자 앞에 붙는 전속가수, 주역이라는 타이틀은 결과물일 뿐.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치열한 경쟁을 치른다. 세계 각국에서 내로라하는 성악가들이 독일로 몰려들어 오디션을 본다. 동양인 테너로서 유럽 문화권에서 외국어로 대사를 전달하는 일은 매일이 도전이었다.  


“저의 독일 생활에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드레스덴은 독일에서도 문화의 도시로 유명하고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관련악단은 세계에서 꾸준히 탑 10 안에 드는 오케스트라입니다. 제가 부르는 노래가 만들어진 환경과 문화 안에 살고 있으니 작곡가들이 어떤 배경과 마음으로 이런 곡들을 만들었는지도 느낄 수 있어 좋았죠. 그러나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연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배로 노력이 필요했죠.”  


성대 다친 뒤 근육과 발성법 공부 

'노력'이라는 발음이 명료하게 들렸다. 그건 발음과 연기뿐 아니라 소리와 성대의 형태도 새롭게 세공한다는 의미이다. 전주은은 성악 레슨 2개월 만에 울산예술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음악춘추 1등, 경원대학 콩쿠르 1등,  난파 콩쿠르 남자부분 1등을 휩쓸면서 단숨에 성악 기대주로 떠올랐다. 현직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스터 클래스에서 유일하게 학생 신분으로 참여해 이탈리아 유학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한양대와 연세대를 동시에 합격하고 존경하는 스승이 있는 한양대 음대로 진로를 결정했다. 이 모든 과정이 성악을 배운지 만 3년 만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악계 샛별로 떠오르자마자 시련이 찾아왔다. 대학교 1학년 무렵 성대를 크게 다친 것. 학교를 쉬면서 목을 치료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등학교 때 모두가 기대하는 유망주였는데 목소리를 잃고 좌절하고 괴로워하는 시간이 대학생활 내내 이어졌어요. 연습을 할 수도 없고 변한 제 목소리를 듣는 것 자체가 괴로웠어요. 하지만 제 꿈이 오페라 가수였고 그만둘 수 없어 목의 문제를 안고 독일 유학길을 떠났습니다.” 


독일에서의 시간은 어찌 보면 성악가로서 두 번째 생을 사는 계기가 됐다. 이전의 우렁차고 강한 소리를 버리고 독일 오페라 무대에서 원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성대를 디자인했다. 모차르트 테너의 소리로 할 수 있는 레퍼토리들을 공부하면서 최대한 목을 보호하는 방법을 익혔다. 10대에는 타고난 재능과 가진 힘으로만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보니 쉽게 목이 상했다. 20대가 되어서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가며 소리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데 집중했다. 내가 낸 소리가 정확히 핀 마이크 앞에 똑 떨어질 수 있도록, 잘 들리면서도 목을 상하지 않게 쓰도록, 매일 공연하면서 늘 같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도록.  


드보르작 국제 콩쿠르 1위 수상 

이 비밀을 풀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했다. 도전에 의의를 두고 나갔던 드보르작 국제 콩쿠르(Antonin Dvorak's International Singing Competition)에서 덜컥 1등을 해버렸다. 드보르작 콩쿠르는 체코 유명 온천 휴양지인 카를로비 바리에서 개최되는 콩쿠르로 전설적인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 (Edita Gruberova), 최고의 스타 베이스 르네 파페(Rene Pape), 스타 테너 파볼 브레슬릭(Pavol Bršlík) 등을 배출한 전통있는 대회이다.  

“기억에 남았던 것은 같이 경연에 참석한 몇 명의 참가자들이 서로 경쟁자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훌륭한 연주였다며 자기들이 더 흥분하며 저를 축하해 줬어요. 그 순간은 그동안 목을 다쳐 노래를 이전같이 할 수 없어 괴로웠던 마음이 어느 정도 치유되는 듯 했습니다. 이후 결선까지 잘 치르고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 듣고도 믿기 힘들게 제가 1등으로 불렸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그런 목상태로 그렇게 노래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이 아니었나 생각해요.” 


차도가 없던 목상태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온 시점도 이 즈음이다. 대학교 1학년 때 목을 크게 다친 이후 10년 만이다. 재채기 한 번만 해도 쉬어버리던 목이 건강해지고, 없어졌던 저음이 다시 나기 시작하고, 소리도 조금씩 힘을 찾기 시작했다. 성대는 다루기 까다로운 연약한 근육이다. 이 근육을 오랜 시간 어르고 달래가며 보듬은 결과이다. 



아내는 예술 동반자,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해 

그 긴 여정 속에 그의 아내가 있다. 전주은은 아내가 없었다면 지난한 성대 재활과 유학 시절을 견디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아내는 한양대 성악과 입학식에서 처음 만난 같은 과 동기이다. 영화에서처럼 주변이 온통 까맣게 암전된 채 한 사람 얼굴에만 핀 조명을 비춘 듯이 환하게 불이 켜졌다고 한다. 첫 눈에 반한게다. 보자마자 사랑에 빠진 남자와는 달리 여자는 아무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사랑의 작대기는 엇갈리기만 하고, 도무지 닿을 것 같지 않았던 남녀의 마음은 시간이 흘러 남자가 복학한 후에야 쨍하고 운명의 합을 이뤘다. 마침 여자의 이름 또한 주은이다. 김주은. 이름이 같은 남녀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을 확률이 과연 몇 퍼센트나 될까. 운명임에 틀림이 없다.  


“오랜 시간 구애해서 마음을 얻게 됐죠. 제가 아내를 너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이해 못하겠다고 하는 주변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까지도 제 눈에는 아내가 가장 예쁘고 사랑스럽습니다. 저에게 제 아내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경쟁자이자 애인이에요. 같이 있을 때 가장 행복해요. 이렇게 평생 함께 늙어가는게 제 소망이에요.” 


결혼 16년 차 부부의 입에서 나온 소리치곤 적잖이 달콤하다. 여전히 꿀 떨어지게 달달한 비결이 뭘까. 주은 부부는 독일 유학 중 2년 동안 서로 떨어져 주말부부로 지냈다. 아내 김주은은 드레스덴 공대(Technical University·TU Dresden)에서 음악이론 과정을 공부하고 있었고, 남편 전주은은 극단 생활을 하느라 다른 도시에서 생활해야 했다.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어린 아이들을 두고 주말부부로 지내려니 절로 전우애가 피어났다. 낯설고 물설은 외지에 둘만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는 특수성, 서로 의지할 수밖에 없는 환경성, 한인 커뮤니티가 활발하지 않아 먹고 싶은 음식은 스스로 생산해내야 하는 고립성이 가족을 더욱 애틋하게 만들었다.     


미우나 고우나 양쪽 발을 맞춰 걸어야 하는 운명 공동체로서 부부는 함께 성장해갔다. 긍정적인 자극을 주고받으며 16년을 한결같이 사랑했다.  


“신기하게도 저희는 서로 부족한 부분이 상대에게 있어요. 제가 부족한 부분을 아내가 많이 가르쳐줘요. 같은 전공이기 때문에 제 상황을 잘 이해해주고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니 너무 감사하죠. 주은이는 주변을 항상 기분 좋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에요.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은 사랑을 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인생 3막 펼칠 것 

주은 부부는 독일 생활을 마감하고 지금 미국 뉴저지에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오페라 가수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언어에 대한 갈증을 채우고자 독일어에 이어 영어 정복에 나섰다. 전주은의 가장 큰 강점은 음악을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 그는 곡 하나를 두고 생선살을 바르듯 정교하게 해부한다. 작곡가가 어떤 심정으로 곡을 썼을까부터 시작해서 원곡의 감정을 살리기 위해서는 가수가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오래 고민한다. 그는 고민하는 과정이 즐겁고 재미있다. 영어를 조금 더 깊이 알고 나면 표현의 깊이가 한층 깊어지지 않겠느냐고 들뜬 목소리로 기대감을 드러냈다.  


한국에서 1막, 독일에서 2막, 미국에서 펼쳐질 주은 부부의 3막은 어떤 장면일까. 멀지 않은 시기에 뉴욕 오페라무대에서 건강하고 즐겁게 노래할 그들의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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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은 테너 


한양대학교 성악과 졸업 후 독일 드레스덴 국립음악대학교에서 Diplom, Master, Meister Klasse 과정을 졸업했다. 체코 드보르작 국제 콩쿠르 1위 등 다수 콩쿠르에서 수상했다. 오스트리아, 독일을 중심으로 오페라 주역 가수로 100회 이상 공연을 했다.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 홀, 오스트리아 빈 콘체르트하우스(Wiener Konzerthaus), 독일 드레스덴 크로이츠(Dresden Kreuzkirche) 등 세계 유수의 콘체르트 하우스에서 공연한 경험이 있다.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2020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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