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끌로이 Sep 09. 2020

'마음을 울리는 노래를 전한다', 소프라노 천세정



'노래'라는 길을 걸어오면서 요즘처럼 난감한 시기가 또 있었을까. 소프라노 천세정은 무대 위 빛나는 조명과 무대를 가득 메우는 선율, 관객의 환호가 그 어느 때보다 그립다. 앞으로 당분간은 한 공간에서 같이 호흡하고 땀 흘리며 연습하는 풍경은 볼 수 없게 됐다. 그것이 언제까지일지 아무도 모르기에 더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들어주는 청자가 있어야 들려주는 화자는 존재 의미가 있다. 노래가 특히 그렇다. 혼자만의 노래는 빛이 나지 않는다. 


“노래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있는 무대가 없어 답답하죠. 음악이란 본디 들려주고 감동을 나누며 교감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데 그것이 허락되지 않잖아요. 저는 음악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에요. 요즘은 무대의 소중함을 더 절실하게 느낍니다.” 



스스로를 재정비하기 좋은 시기 

세정은 생과 사의 명암이 처절하게 엇갈리는 도시, 뉴욕에 살고 있다. 6년 전, 성악을 공부하기 위해 뉴욕에 발을 디뎠을 때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세계의 중심가 뉴욕 맨해튼이 만화의 한 장면처럼 텅 비어버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리다.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물음에 세정은 음악 인생을 되돌아보고 스스로를 재정비하는 기회라고 생각한다며 유쾌하게 대답했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사회적 거리 두기'를 실천하는 지금이야말로 잠시 숨고르며 음악을 숙성시킬 절호의 시간 아니던가.  


뉴욕과의 첫 인연은 대학을 졸업한 뒤 맨해튼 음악학교(Manhattan School of Music)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서울대 음대 재학 중에 프랑스 니스에서 열리는 음악캠프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고, 그 때 미국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친구들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발성이나 발음에 있어 정형화된 교육을 강조하는 한국 교육에 비해 미국에서 공부한 친구들은 틀에 가두지 않은 자유로운 음악 표현을 구사하고 있었다. 세정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한국에서는 소리나 딕션같이 일차적으로 귀에 들리는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소리를 다듬는 데에만 많이 치중하는 편이지요. 저 또한 그랬고요. 하지만 그 친구들은 소리가 약하고 안정적이지 않아도 그 목소리를 가지고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요. 색다른 매력이었어요. 미국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기에 저런 아이디어를 가지고 음악에 접근을 하는 건지 정말 궁금했었어요.”



뉴욕에서의 유학은 불안과 외로움의 연속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어린이와 마법사(L’Enfant et les Sortilèges)', '박쥐(Die Fledermaus)', '헨젤과 그레텔(Hansel and Gretel)' 등 다양한 오페라 작품을 소화하면서 한층 성숙해졌다. 세정은 2년여 동안의 유학기간이 큰 전환점이 됐다고 말한다.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타지에서 공부하면서 차원이 다른 외로움과 힘겨움을 경험했다. 뒷바라지 해주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나태해지는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 정도였다.  


“유학생 대부분이 이런 정서를 가지고 공부할 거예요. 젊고 아름다운 나이이지만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주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실제로는 아름답게 보내지 못했어요. 정신적으로는 힘든 시기였죠.” 


유학 중 문화 봉사 활동하며 음악 발전시켜 

유학 기간,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문화 봉사를 시작했다. 플루트를 전공하는 같은 학교 선배의 소개로 문화예술봉사단체 이노비(EnoB)에 들어가게 됐다. 음악으로 소외된 곳을 보듬는 찾아가는 콘서트라는 취지에 걸맞게 드윗 양로원, 슬론 암센터 같은 곳에서 이색 콘서트를 벌였다.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와 문화, 처한 처지가 다르다 해도 음악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통하는 만능 언어라는 진리를 깨달았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에는 대부분 환자들의 표정이 어둡다. 몸이 아프면 정신까지 피폐해지고 얼굴에 짜증과 고단함이 묻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자 사람들 표정이 점차 밝아진다. 고통에 찌들어 일그러진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세정은 자신의 목소리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에 진심으로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제가 선한 영향력을 전파할 수 있을 만큼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음악가는 아니지만, 제 음악이 단 한분께라도 감동과 위로를 드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일이지요. 이노비 활동은 유학 와서 처음으로 하게 된 봉사활동이었는데요. 제 노래를 듣고 환우들이 박수치면서 함께 따라 부르면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고 도리어 제가 큰 감동과 감사를 느끼게 되었어요.” 


고등학교 기간 내내 정체성 고민 

세정이 처음 성악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열정 가득한 음악가가 될 줄 몰랐다. 음악을 전공하는 여느 학생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일찌감치 전문교육을 받는데 비해 세정은 중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성악을 배웠다. 일 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짧게 공부해서 원하는 예술학교에 진학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음악에 소질이 다분한 줄 알았다. 끼와 실력을 갖춘 전국의 음악 신동들을 모아놓은 예술학교이다보니 금세 현실이 보였다. 자아도취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내가 과연 음악을 잘 하는 사람일까. 노래를 진정으로 원하고 있나.' 세정은 예술학교를 다니는 3년 내내 이 고민을 안고 살았다. 그러다 대학교 때 휴고 볼프가 쓴 가곡 마음 변한 소녀(Hugo Wolf, ‘Die Bekehrte’)를 부르면서 갈피를 잡았다. 


"이 곡이 너무 좋아서 단어 하나하나 다 찾아보고 음원들을 찾아서 들어봤어요. 어떻게 하면 이 곡의 작곡 배경과 분위기를 잘 살릴 수 있을까 고민했어요. 그런 제 모습을 보고 문득 혼란한 마음이 정리됐어요. 이 곡을 내 음악으로 만들어 표현하고 싶을 만큼 내가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죠.” 



좋은 소리 오래도록 전하고픈 열망 커 

성악가에게는 무대에서의 화려한 시간보다 연습실에서의 고독한 시간이 더 길다. 그 과정마저 행복하려면 진심으로 노래를 사랑해야 한다. 세정에게 성악은 단지 노랫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니다. 생각을 발성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성악이다. 좋은 소리를 오래도록 전하기 위해 항상 건강한 생각으로 마음을 다해 노래하려 노력한다. 듣기에 부담 없는 깔끔하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세정이 가진 최고의 보배이다. 이 장기를 십분 발휘하기 위해 소규모 하우스 콘서트나 리사이틀 공연 중심으로 활동해왔다.  


최근 가장 인상 깊었던 무대를 꼽아달라고 부탁하자 한참을 곱씹다가 작년 12월에 있었던 첼리스트 이지현의 독주회를 언급했다. 각 장 마다 다른 악기들과 협연하는 독특한 구성이었다. 여기서 세정은 첼리스트와 함께 세 곡을 연주했다. 묵직한 첼로 선율에 고운 세정의 음색을 덧입혀 색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한국과 뉴욕에서 수많은 무대를 소화해왔을 터인데 세정이 이날 무대를 손에 꼽은 이유가 뭘까? 


결혼 후 뉴욕에 정착하며 마음가짐 달라져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석사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박사 과정에 들어갔다가 결혼을 하면서 뉴욕에 완전히 정착하게 됐다. 유학생으로 뉴욕에 보따리를 풀었을 때와 한 가정의 아내이자 엄마로 뉴욕에 뿌리를 내린 지금은 각오가 사뭇 다르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고, 소리에도 여백과 공명이 커졌다. 사랑이나 증오, 질투 같은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이해하는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작년 12월, 첼리스트 이지현 독주회 무대는 세정이 남편에게 자신의 연주 모습을 처음으로 보여준 자리였다. 그동안 동영상이나 연습 모습만 봤을 뿐 고운 드레스를 차려입고 여러 관객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른 연주 때는 내게 주어진 것을 잘 소화해서 좋은 음악을 선보이자는 각오 정도였다면 그날은 유독 남편이 신경 쓰였어요. 프로 성악가의 면모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나봐요. 유난히 떨렸어요. 입장할 때부터 남편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노래가 끝날 때는 혼자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죠. 창피하면서도 내심 기분이 너무 좋더라고요. 남편이 응원해주고 예쁘게 봐주니 다음에도 더 좋은 무대로 저의 영원한 팬을 만족시키고 싶어요.”


무대에서 노래하는 매 순간이 벅차 

노래를 하는 매 순간마다 벅차지만 특히 무대에 올랐을 때 느낌이 새롭다. 첫 음절을 떼기 직전의 긴장감, 적막 속에 반주 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의 경쾌함, 관객과 눈 맞추며 뚜렷하게 가사를 전달하는 맛 등. 요소들이 합해져 몰입감을 더한다. 세정은 무대 위에서 노래를 하는 순간은 마치 드라마 주인공이 된 듯 황홀하다고 고백한다. 화려한 기교고 뭐고를 떠나 관객과 함께 절정의 순간을 공유한다는 느낌에 도취된다. 세정이 제일 좋아하는 노래일 때는 감동이 배가 된다. 반주가 흐르자마자 '아! 이 노래를 내가 부르다니, 기쁘고 행복하다.'는 감사인사가 절로 나온다. 


앞으로 하우스 콘서트, 리사이틀 공연에서 관객과 만나고파 

세정의 음색과 연주 성향을 따져보면 소규모 하우스 콘서트나 리사이틀 무대가 제격이다. 무대가 작으면 관객 수가 적다. 관객 수가 적으면 어떤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오는지 파악하기 쉽다. 세정이 무대 구성을 짤 때는 가장 먼저 누가 내 노래를 들으러 오는가를 고려한다. 성악을 즐겨 듣지 않는 부류의 관객들이라면 대중적으로 유명한 곡들을 엄선한다. 어디서 한번쯤은 들어봤음직한 귀에 익은 곡으로 준비한다.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축배의 노래나 영화 ‘파리넬리’의 유명곡 ‘울게하소서(Lascia ch’io pianga)’가 대표적이다. 그 중에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선율이 흥겨운 곡들을 듬성듬성 넣어 관객들의 음악 편식을 막는다. 


반대로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듣는 관객들이 대다수라면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과감하게 시도한다. 일정한 주제를 정해 놓고 노래를 묶어 들려주기도 하고 한 작곡가의 작품 전체를 연대별로 구성하기도 한다. 관객들의 집중도를 높이기 위한 영리한 전략이다. 


“성대를 포함한 사람의 몸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고 세포들 간의 밀도가 느슨해져요. 인력으로 막을 수 없겠지만 최대한 늦출 수는 있겠죠. 저는 최대한 오래 제 목소리를 내고 싶어요. 그래서 악보를 보면서 어떻게 소리를 내고 또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 나갈 것인지 공부하는 시간을 많이 가져요. 가사를 미리 읽어서 입에 붙여 놓고, 악보에 미리 어떤 플랜을 가지고 노래를 할 것인지 생각해서 적어놓죠. 그러면 실제로 소리를 내는 시간을 줄일 수 있어요. 목을 아끼는 나름의 방법이죠.” 


세정의 꿈은 소박하다. 관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성악가가 되기. 그 뿐이다. 관객들이 세정의 노래를 듣는 순간 근심걱정은 잠시 잊고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 놓았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게 된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을 거라고 상쾌하게 웃는다. 세정의 노래는 지금도 꾸준히 숙성되고 있다. 앞으로 들려줄 노래에는 어떤 울림과 감동을 담아낼지 기대된다.  



============================= 

천세정 소프라노 

오페라 '어린이와 마법사(L’Enfant et les Sortilèges)', '박쥐(Die Fledermaus)', '헨젤과 그레텔(Hansel and Gretel)'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으며, 정수장학회 콘서트 등 다수의 리사이틀 공연에 참여했다. 

- 2017~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박사과정 중 

- 2014~2016  맨해튼 음악학교(Manhattan School of Music) 석사과정 졸업 

- 2010~2014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학사 졸업 

- 2008~2010  서울예고 성악 전공 졸업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VOL.38*

매거진의 이전글 '신개념 아파트호텔이 대세',도미오 창업자 재이 로버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