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아가 날아오를 때 지구의 중력이 일순간 사라진 듯 하다. 발등은 둥글게 휘어 다리와 나란히 뻗었고, 손은 마디 끝까지 힘이 가득 차 있었으며, 등과 허벅지는 근육이 역동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꾸준히 단련한 발레리나의 몸은 완벽 그 자체이다. 발레리나들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푹 빠지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부족한 점만을 꼬집어보게 된다. 작은 결점 하나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여 나머지 장점이 묻히기 일쑤다. 박원아에게는 보여지는 몸의 라인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다. 춤을 출 때 그의 몸은 신비로운 힘을 발산한다.
입단 3년 만에 수석 무용수로 승급, 초고속 승진
샌프란시스코발레단이 솔리스트로 활약해온 박원아를 수석 무용수로 승급시켰다. 정단원으로 입단한지 3년 만이다. 샌프란시스코발레단에 한국인 수석 무용수는 박원아가 최초이다. 축하 인사를 건네기 위해 박원아 발레리나를 전화로 만나봤다. 수줍게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배시시 웃는다.
“승급 소식을 집에서 헬기 토머슨 단장님께 영상통화로 들었었는데 격리 상태여서 모든 공연과 리허설을 중단한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더 얼떨떨했어요. 너무 기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고 어린 내가 다른 주역들과 같은 위치에서 춤을 추려면 정말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겨요.”
원아는 2015년 선화예고 1학년 재학 중 여름방학 때 샌프란시스코 발레스쿨 오디션에 장학생으로 발탁된 후 홀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때 나이 열여섯. 겁이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막연한 기대와 패기만 있었다. 발레학교를 마치자마자 2017년 샌프란시스코발레단 정단원으로 입단, 이듬해 군무에서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2년 동안 짧은 솔리스트 생활을 마치고 이제 수석 무용수로 빠르게 성장했다.
꾸준한 단련으로 이룬 결과
숫자로 보면 원아의 승급은 이례적인 고속 승진이 맞다. 하지만 알맹이를 보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아무리 타고난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차근차근 다듬어야 무대에서 정확성과 우아함이 나오듯이 원아는 그 과정을 촘촘하게 잘 다듬었다. 밥 먹고 연습하고 공부하고 빨래하고 다시 연습하고... 일상이 단련이다.
준비된 무용수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다
발레에는 지름길이 없다. 준비된 무용수에게만 기회가 온다. 지금 자리가 솔리스트라 할지라도 늘 맡은 역할 이상의 것을 준비했다. 작품에서 주역은 수석 무용수들이 맡는다. 만약의 사고와 부상에 대비해 대역을 따로 정해놓는데, 언더스터디인 대역 배우들은 무대 리허설 기회조차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아는 따로 개인 리허설을 했다.
공연 일주일을 남기고 주역 무용수가 부상을 당하면서 갑자기 원아에게 역할이 돌아갔다. 실력을 보여주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회였다. 결정적인 순간 빛을 발하면서 헬기 토머슨 예술 감독의 눈에 제대로 각인됐다.
예상치 못한 깜짝 승급은 솔리스트 때도 마찬가지였다. 발레단 입단 후 첫 번째 시즌 마지막 프로그램 공연 기간에 한 주역 무용수가 다쳐서 대역인 원아가 그 자리를 메꿔야했다. 통보를 받은 시점이 공연 이틀 전이었다. 단 하루 호흡을 맞추고 바로 무대에 올랐다. 물론 실수 없이 깔끔하게 소화했다. 위기 순간에 당황하지 않고 척척 해낼 수 있었던 힘은 연습이었다.
“저는 뭐든지 빨리 배우는 편인데 그 점이 발레단에 와서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저에게 주어진 기회 대부분 긴급 투입된 공연들이었는데, 그 때 빨리 배워서 공연을 하는 모습이나 준비된 모습들이 신뢰감을 줬겠죠. 단장님이 주신 두 번의 기회는 승급 심사 오디션 이었다고 생각해요.”
성실, 끈기, 노력으로 헬기 토머슨 예술 감독 눈에 띄어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은 1933년 설립된 미국 최초의 전문발레단으로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뉴욕시티발레단, 보스턴발레단과 함께 미국 최고의 명문 발레단으로 꼽힌다. 특히 헬기 토머슨 예술 감독은 35년 동안 발레단을 이끌고 있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 예술 감독 중 최장기 임기를 기록하고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
지금까지 섰던 무대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역할이 무엇이냐 묻자 주저 않고 돈키호테 '키트리'를 꼽았다. 원아가 처음 전막 데뷔했던 역인데다 솔리스트 승급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귀한 무대이기 때문이다.
“공연 2주 전에 급하게 배우게 됐는데, 부담감이 정말 컸어요. 짧은 시간동안 많이 연구하고 연습하고 공을 들였어요. 지금 공연 영상을 보면 부족한 부분이 많이 눈에 띄지만 처음으로 한 전막공연이어서 그런지 애착이 많이 가요.”
예술학교 진학 위해 서울로 이사
원아는 여덟 살에 발레를 시작했다. 국립발레단 선생님 특강 교실에서 '잘한다. 소질이 있다'는 칭찬을 들은 뒤 본격적으로 충남 천안과 서울을 오가며 발레 최강국이라 불리는 러시아 바가노바 발레아카데미 스타일 레슨을 받았다. 반년 이상 장거리 수업을 다니다 결국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를 했다. 외동딸을 예술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믿음, 원아의 노력, 보석을 알아본 선생님의 안목이 정확하게 삼위일체를 이뤘다.
줄곧 발레에 의한, 발레를 위한 인생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박원아의 육체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군더더기가 없다. 물론 그것은 명절과 휴일까지 혼자 연습실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빚어낸 조각품이다.
혹독한 자기 관리는 발레 예술가의 숙명
공기처럼 가볍고, 동시에 힘 있는 몸을 유지하기 위해 원아는 항상 식단 조절을 한다. 하루 동안 먹은 음식을 모두 기록한다. 보통 요거트와 과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할 때에는 샐러드나 샌드위치를 먹는다. 발레 연습 외에 유산소 운동도 꾸준히 한다. 자기 몸의 근육과 세포, 움직임을 알고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려 노력한다.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발레 예술가는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불나방처럼 무대에 자신을 던진다.
정신적 스트레스는 발레 연습으로 풀어
정신 수련 또한 빼놓지 않는다. 힘들 것 같아서 안하는 것들 대부분은 안 해서 힘든 일들이다. 박원아하면 발레와 발레리나를 떠올리듯이 그와 발레는 이미 한몸인 듯 하다. 원아에게 발레는 직업이자 자신을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이다. 오직 발레뿐인 삶이 어쩌면 무서울 수도 있지만 원아는 그 조차도 즐겁다고 말한다.
“정신적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연습으로 풀어요. 뭐든지 준비가 확실히 되면 불안감이나 스트레스가 덜 하거든요. 안 해서 불안한 것이죠. 해야 되는 게 있는데 안하니까 스트레스 받고 힘들죠. 그래도 이제는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해요. 발레 세계 밖으로 시야를 넓혀야 발레리나의 생명을 연장하는 힘이 생길 테니까요.”
원아에게 닮고 싶은 롤모델이 누구냐고 물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보통 러시아 발레단의 누구, 전설적인 발레리나 누구를 꼽는다. 원아는 김연아 피겨스케이팅 선수를 롤모델로 꼽았다. 주변에 흔들리는 않는 단단한 자기중심, 강인한 정신력, 깔끔하고 정확한 연기력이 좋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김연아 선수와 박원아 발레리나가 닮은 듯 보인다. 자신 있는 태도와 선명한 눈빛이 닮았다.
믿음 주는 무용수가 되기 위해 혹독하게 절제해
원아의 꿈은 단순하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타이틀을 달고 발레와 함께 오랫동안 걷는 일. 그러기 위해서는 절제에 능해야 한다. 발레 예술가는 얼굴 각도와 근육, 뼈, 손목의 가는 힘줄까지도 컨트롤해야 하는 직업이다. 평상시에도 감정을 절제할 줄 알아야 무대에서 관객을 이끌어갈 수 있다. 원아에게는 절제와 정열이 조화를 이룬 신비로운 힘이 있다.
“지금까지 클래식 발레라는 울타리 안에서만 살았어요. 기회가 된다면 오네긴 '타티아나' 역할을 꼭 해보고 싶어요. 어릴 때 오네긴을 보고 깊게 감동을 받았어요. 클래식 발레와 드라마 발레의 울타리를 넘나드는 발레 예술가가 되고 싶어요.”
샌프란시스코발레단은 3월 중순 조지 발란신의 ‘한여름 밤의 꿈’ 무대를 끝으로 올해 공연을 마감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무대를 비운적은 처음이다. 내년 초에나 다음 공연을 시작한다. 원아는 이 기간 또한 기회로 생각한다.
“비시즌기간에 저는 발레를 놓고 쉬려고 노력해요. 이번 쿼런틴 기간에도 저를 채우기 위해 집중했어요.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해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리기도 하고요. 쉴 때는 제대로 쉬고 연습할 때는 제대로 쏟아 부어요.”
같은 발레단 소속 남자친구는 훌륭한 선배이자 다정한 연인
한국에서 충분히 충전을 시간을 갖고 이제 내년 시즌 준비를 시작한다. 8월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다시 프로그램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곳에 원아의 남자친구가 있다. 같은 발레단에 있는 중국인 발레리노 밍솬 왕(Mingxuan Wang)과 3년째 교제 중이다. 밍솬 왕 발레리노는 샌프란시스코발레단에 입단한지 8년차인 선배이다. 원아는 “남자친구의 존재 자체만으로 큰 의지가 된다”면서 배울 점이 많은 선배이자 다정한 연인이라고 소개한다.
내년 시즌부터는 원아를 주역 무용수로 만나 볼 수 있다. 수석의 자리가 주는 영예만큼 무게감이 상당하다. 발레단 입단 3년차, 21살 무용수에게 버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원아는 부담스러운 한편 설레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박원아가 나온다면 꼭 봐야지'라는 말을 듣도록 인정받는 무용수가 되겠다고 자신감을 드러낸다. 그의 각오가 의미 없는 구호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원아라면 왠지 200% 이상 해낼 것만 같다. 원아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앞으로 다가올 시즌이 너무 기대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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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아
2015년 선화예고 1학년 중 샌프란시스코 발레학교 입학(San Francisco Ballet School level 8)
2017년 샌프란시스코발레단 정단원으로 입단
2018년 샌프란시스코발레단 솔리스트 승급
2020년 샌프란시스코발레단 수석무용수(Principal dancer) 승급
2012 Sicilia Barocca grand prix 수상
2013 서울 발레콩쿨 금상 수상
2014 한국프로발레콩쿨 대상 수상
2014 서울국제무용콩쿨 1등 수상
*S.CASA (New York 문화.예술 스토리 매거진) VOL.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