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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Nov 09. 2022

 <하얼빈> 김훈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순간, 소설 <하얼빈>은 그 순간에서 출발한다. 폭력과 야만으로 가득찬 시대, 누군가는 희망이 없다며 좌절하고 누군가는 조국을 등지고 권력에 기생하는 삶을 선택했다. 혹독한 시절을 살다 간 청년들의 짧고 강력했던 생애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안중근을 다룬 기존의 도서들이 위인이 어떤 집에서 태어나 자랐는지 일대기를 시간 순으로 기록하는 데 주력한 것과 달리, 김훈 작가의 <하얼빈>은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전후 짧은 나날에 초점을 맞추어 안중근과 이토가 각각 하얼빈으로 향하는 행로를 따라간다. 안중근의 삶에서 가장 강렬했을 며칠간의 일들이 극적 긴장감을 지닌 채 선명하게 재구성된다. 정확한 사료가 없기에 책은 작가의 상상과 짐작에 기반한 소설 형식으로 만들어졌지만 사실상 사실을 기록한 논픽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기로 결단하는 순간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인 운명이었다. 암울한 미래에 고뇌하며 간도와 연해주 일대를 떠돌던 안중근의 하숙집으로 신문지 한 조각이 흘러드는데, 그 위에는 통감 공작 이토가 대한제국의 위상을 격하하고 일제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교묘히 연출한 순종 황제의 사진이 실려 있다. 사진에 암시된 일제의 야욕을 감지한 안중근은 마음을 정하고 이토가 방문할 하얼빈을 향한 생애 마지막 여정에 오른다. 안중근은 곧바로 의병 활동을 함께했던 동지 우덕순을 찾아간다. 우덕순 역시 안중근의 의중을 간파하고 두말없이 동행을 결정한다. 같은 목적을 가진 두 청년의 망설임 없는 의기투합이 간결한 대화를 통해 전달되며 묵직한 인상을 남긴다. 


한국 청년 안중근의 대의는 동양 평화였고, 그가 확보한 물리력은 권총 한 자루였다. 실탄 일곱 발이 쟁여진 탄창 한 개, 그리고 강제로 빌린 여비 백 루블이 전부였다. 그때 그는 서른한 살의 청춘이었다. 


둘은 사진관 의자에 앉았다. 사진사가 카메라 뒤에서 러시아 말로 뭐라고 소리치더니 셔터를 눌렀다. 새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몸 매무새와 이발을 한 이목구비가 사진에 찍혔다. 안중근은 사진값으로 이 루블을 냈다. 러시아인 사진사가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닷새 후에 와서 사진을 찾아가라고 말했다. 닷새 후에 올 수 없다는 걸 알면서, 안중근은 고개를 끄덕였다. - p142 


구한말, 쇠약해져가는 조국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만 했던 청년들의 결기가 들끓고, 맨몸으로 부딪친 민중들이 공허하게 스러지던 어두운 시대상이 고스란히 읽힌다. 안중근이 좇는 대의와 그가 느끼는 인간적인 두려움은 더욱 효과적으로 대비를 이룬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자신과 타인의 희생을 불사하면서도, 집안의 장남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며 천주교에서 세례 받은 신앙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수시로 머뭇거리는 모습은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낯선 면모이다. 


일본인 검찰관이 거사를 단행한 안중근 일행을 조사하며 남긴 신문조서와 공판 기록이 적재적소에 활용되어 소설의 현장감을 높인다. 극도로 정제된 공문서의 딱딱함과 처절할 정도로 비극적인 인간사가 묘하게 어우러진다. 건조해 보이는 이 문서들이 소설 맥락 속에 절묘하게 배치됨으로써 당시의 뜨거웠던 현장을 입증하는 절절한 기록으로 다시 읽힌다. 


소설에서 안중근과 이토의 갈등만큼이나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와 한국 교회를 통솔하는 뮈텔 주교의 갈등이다.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신에게 죄를 고할 수 있기를 염원한다. 빌렘 신부는 고해성사를 베풀어주려 하고, 뮈텔 주교는 한국에 겨우 자리 잡은 천주교의 뿌리가 또다시 흔들리는 것을 우려해 반대한다. 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애쓰는 빌렘과, 교회의 안위를 위해 역설적으로 세속과 결탁한 뮈텔의 대치는 신념과 현실의 갈등을 나타낸다.  


김훈 작가는 “안중근을 그의 시대 안에 가두어놓을 수는 없다.” 라고 소설 집필 이유를 밝혔다. <하얼빈>은 김훈이 작가로 활동하는 내내 인생 과업으로 삼아왔던 특별한 작품이다. 작가는 청년 시절부터 안중근의 짧고 강렬했던 생애를 소설로 쓰려는 구상을 품고 있었고, 안중근의 움직임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글로 감당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여 ‘인간 안중근’을 깊이 이해해나갔다. 역사 교과서에 단순하게 요약되기 쉬운 실존 인물의 삶을 작가는 상상으로 탄탄하게 재구성한다. 이러한 방식은 그의 대표작 <칼의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데, <칼의 노래>가 명장으로서 이룩한 업적에 가려졌던 이순신의 요동하는 내면을 묘사했다면 <하얼빈>은 안중근에게 드리워져 있던 영웅의 그늘을 걷어내고 그의 가장 뜨거웠을  시간을 현재에 되살려놓는다. 


김훈 작가가 그리는 안중근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시대에 온몸으로 길을 트며 전진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약간의 기대와 환상도 엿보인다. 안중근이 부딪혔던 벽은 그로부터 백여 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한 듯하다. 청년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길을 찾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 그렇기에 안중근의 생애는 시대를 뛰어넘어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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