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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Oct 31. 2022

자유


 


21세기에 발표됐지만 <안나 카레니나>나 <마담 보바리>같은 고전 소설을 읽을 때의 느낌을 받는 책이 있다. 그런류의 소설들은 뻔한 줄거리 같은데 간단하게 요약이 되지 않는, 겹이 두툼한 소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조너선 프랜즌의 <자유> 역시 그렇다. 


미국 중서부 미네소타 주의 오래된 도시 세인트폴에 사는 중산층 가정, 소설은 월터와 패티 버글런드 부부와 그들의 자녀 제시카와 조이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가정적이고 충실한 남편 월터는 다국적 기업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젊은 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자연보존협회로 옮긴다. 대학에서 만나 졸업하자마자 결혼한 전업주부 패티는 완벽한 엄마와 따뜻한 이웃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언뜻 보면 안정적인 가정 안에서 각자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가족이다.  


그러나 이내 이 가족의 어두운 이면이 조금씩 드러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아들은 아버지와의 갈등을 견디다 못해 여자 친구가 사는 옆집으로 들어가 살고, 월터는 자연을 파괴하는 석탄 산업계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으며, 패티는 이웃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분노의 화신으로 돌변했다. 


700쪽 짜리 가정사 연대기 <자유>는 겉보기에는 중산층이지만 그 안에 존재하는 공허감과 미국 문화에 대한 환멸을 삼대와 그 세대를 둘러싼 사회·정치·문화사를 통해 말하고 있다. 그 공허와 환멸은, 대한민국 중산층이 이 건조한 사회와 인생에서 느끼는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교양 있는 미국 중산층의 화신으로 여겨지던 이 중년 부부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중산층이자 관용과 품위의 대명사였던 평범한 이웃사촌이 패가망신하며 시작하는 도입부에서 독자는 사랑의 본질을 고찰한 가족드라마로 볼 수도 있고, 잡지 '뉴요커'의 고정 필진이기도 한 프랜즌의 칼럼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겠다. 일방적 정치선전이 아닌, 독자의 주체적 판단을 가능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진보와 보수의 대립, 환경문제, 인종 차별에 대한 풍요로운 체험이자, 우리가 누리는 것이 진짜 자유인지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조너선 프랜즌 작가는 패티와 월터 그리고 월터의 대학시절 룸메이트이자 매혹적인 록커 리처드, 이 세 사람의 관계가 시대의 변화를 겪으며 변해가는 모습과 주인공들의 감정의 결을 세밀하게 담아낸다. 거기에 십대 때부터 이웃집 코니와 성관계를 맺어온 아들 조이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통해 두 세대에 걸친 젊은이들의 사랑과 성, 결혼의 각기 다른 의미를 그린다. 패티의 과보호 속에 자란 조이의 반항, 가족 간의 불화는 곧 패티에게 우울증을 가져오고, 월터가 멸종 위기에 처한 청솔새(표지 사진)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결혼의 언약과 성적 자유 사이에 갈등하던 패티는 순간적인 실수로 월터의 절친 리처드와 불륜을 저지르는 유혹에 굴복하고 만다.   


사람들이 이 나라에 온 이유는 돈을 벌거나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였지. 돈이 없으면 자유에 더 무섭게 집착하게 되는 거야. 흡연으로 사망해도, 아이들을 먹여 살릴 형편이 안 돼도, 아이들이 총 맞아 쓰러져 죽어가도 말이야. 가난할지는 몰라도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자기 인생을 맘대로 망칠 자유라는 거야. - 472p. 


소설 제목은 자유이다. 질곡의 삶을 사는 가족과는 어울리는 않는 제목 같다. 가족 대서사시에 작가가 자유를 끌어온 이유가 뭘까? 자유의 여신상에서부터 자유 민주주의, 자유 시장 경제, 언론의 자유에 이르기까지 자유는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 이념이 되었다. 작가는 더없이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인물들의 개인사를 다룬 가족 드라마 속에 오늘날 사회의 면면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이를테면 9‧11 테러와 조지 W. 부시 정권의 이라크 침공에 대한 보수 대 진보, 세대 간 갈등, 성장과 분배, 개발과 환경, 구세대와 신세대의 가치관과 문화의 차이가 그렇다. 그 과정에서 자유의 의미를 여러 각도로 조명한다. 어쩌면 자유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권리일지 모르겠다.  


조너선 프랜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인터넷 시대의 톨스토이'라고 부르겠다. 자유라는 막연한 이념을 놓고 이토록 쉽게 풀어내는 직관은 작가만이 가진 고유한 능력이다.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법, 자유 또는 방종의 폐해, 선택의 결과에 따르는 책임을 가족 이야기와 엮어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어떤 상처를 줄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더 나아가 가정의 행복과 책임을 자유에 빗대어 강조한다. 조너선 프랜즌은 소설 <자유>를 통해 ‘자유’란 결국 선택의 결과를 책임질 자세가 있는 개인에게만 허용되는 것이며 여러분은 그 제로섬 게임을 충분히 성찰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있다. 


이 소설은 조너선 프랜즌 작가가 1988년 데뷔해 2001년 발표한 세 번째 장편 '인생수정(The Corrections)'으로 전미도서상을 받은 뒤 9년 만에 발표한 작품이다. 미국에서만 100만 부 이상 판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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