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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Oct 24. 2022

단순한 열정



 


나도 내 마음을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고 공감에서 느끼는 행복감이 사라지고 나면, 그것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었더라도 그렇게 마구 이야기해버린 것을 후회했다. 대화를 나누면서 "맞아요. 나도 그래요. 나도 그런 적이 있어요" 하고 남의 말에 맞장구를 치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이런 말들이 내 열정의 실상과는 아무 상관없는 쓸데없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알 수 없는 감정 속에서 무언가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 p21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프랑스 여성 작가 아니 에르노(82). 그에게 어울리는 영화 장르가 있다면 단연 다큐멘터리일 것이다.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는 쓴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작가의 지론처럼 소설은 그녀의 삶이었으니까.  


에르노는 자신의 경험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편적 이야기로 승화시키는 소설로 독보적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1991년에 발표한 <단순한 열정 Passion Simple>이 대표적이다. 이 소설은 그가 이미 르노도상을 수상하는 등 작가로서 이름을 크게 알린 뒤에 나왔다. 내용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 "올여름 나는 처음으로 텔레비전에서 포르노 영화를 보았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선정성과 사실적 서술 때문에 평단과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다른 에르노 작품들처럼 이 소설 역시 도입부부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전개, 문단 사이의 여백, 담담한 문체가 특징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을 단순하게 전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냉철한 관찰과 묘사를 통해 결국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묻는다. 


<단순한 열정>에서 작가는 지독한 사랑을 그려낸다. 57페이지 분량의 짧은 소설이다. 작품에서 남자는 A로 불린다. 하루 종일 A를 생각하고, 기다리며,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애틋한 열정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 연보를 추적해보면 마흔 아홉에 서른여섯 살 러시아 외교관을 만나 사랑에 빠진 것으로 추정된다. 작품은 남자가 고국으로 떠나면서 자연스레 이별하고 두 달 뒤부터 쓰기 시작했다. 에르노는 영화를 선택하는 일부터 립스틱을 고르기까지 모든 일이 오로지 그 사람을 향해 이루어졌던 그 때에 머물고 싶어 <단순한 열정>을 집필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A에게서 전화가 올까봐 어쩔 수 없는 용건이 아니라면 외출도 하지 않았다. 행여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할까봐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 사용도 피했다.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아날로그 감성 충만한 연애방식을 훔쳐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A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그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온 몸이 아프다. 상실감으로 우울증이나 술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무슨 일이든 하려고 노력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차라리 강도가 들어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바랄 때도 있다. 이별한지 6개월이 지났지만 여전히 A의 전화를 기다리고 하루 종일 A를 생각한다. 누구나 공감할만한 연애할 때 특유의 설레고 안절부절못한 여자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머리가 물속에 잠긴 듯 숨 막히는 열정을 솔직하게 묘사한다.   


어렸을 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 사랑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일이라는 작가의 지적이 묵직하게 다가온다.  


아니 에르노는 1988년 A를 만났고, 이듬해 A와 헤어졌다. 1991년 A가 다시 찾아왔지만 사흘 만에 떠나버린다. 이후 소설 <단순한 열정>을 발표한다. 그리고 내면일기 <탐닉>, <집착>을 차례로 내놓았는데 당시에는 평단과 학계에서 큰 질타를 받았다. 여성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욕망과 질투를 허구에 기대지 않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금기됐기 때문이다. 이성 사이 정식적 유대나 소통이 배재된 채 오로지 단순한 욕정으로 기술한 것을 소위 노출증의 하나로 해석되기도 했다.    


프랑스어에서 ‘passion’은 남녀 간의 절절한 애정이란 뜻에서 우리말로 ‘열정’이라 번역하지만 이것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겪은 ‘고통’을 지칭하기도 한다. 대학 시절 아니 에르노가 읽었던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의 삶은 ‘무익한 수난’이다. 작가는 사르트르의 용어에서 형용사만 바꿔 그녀가 겪은 한 시절의 체험을 ‘단순한 수난’으로 명명했으리라. 가난이야 동정과 연대감을 기대할 수 있지만 한 개인이 겪는 차마 고백할 수 없는 이별과 외로움은 그야말로 무익한 수난이다. 그 수난을 겪었던 사람들의 속내를 절절히 형상화한 <단순한 열정>은 단순 노출증 소설로 단죄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작품에서 꾸준히 시대 금기를 건드려왔다. 영화 '레벤느망'의 원작인 <사건>에는 프랑스에서 당대 범죄였던 임신 중절 시술에 대한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다.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이 자신의 일상을 되찾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에르노가 아니라면 누구도 쓸 수 없는 용감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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