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끌로이 Oct 18. 2022

나의 아름다운 정원



 


어떤 소설은 그냥 그 작가의 인생 같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심윤경 작가가 걸어오고 만나고 경험한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기분 좋은 환상에 빠져들곤 했다. 소설은 허구라는 기본적인 이론조차 무의미해지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작가 심윤경의 목소리인지 주인공 동구의 목소리인지 모를 침묵의 소리가 들린다.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산뜻하고 해맑은 한편의 성장소설이다.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있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어린 소년의 성장기를 잔잔한 톤으로 담아낸다. 인왕산 자락의 산동네 마을에 살고 있는 소년 동구에게 6년의 터울이 지는 여동생 영주가 태어난다. 동구는 순수하고 사려 깊은 아이지만 3학년이 되도록 한글을 읽지 못하여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처지이고, 집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고부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반면 사랑스런 여동생 영주는 늦둥이로 태어나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모으며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어 세 돌도 되기 전에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한글을 줄줄 읽는 영재성을 보인다. 


3학년 담임 선생님은 그저 공부 못하는 돌대가리로 구박만 받던 동구가 실은 난독증으로 고통 받고 있음을 알아내고 그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려 노력한다. 난생 처음으로 이해와 관심을 받게 된 동구는 선생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흠모하게 된다.  


동구의 집이 청와대, 중앙청 등과 가까운 인왕산 자락에 있다 보니 그 나이대 어린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10.26, 12.12 등 굵직한 역사 현장을 경험한다. 옆 동네에 사는 덩치 큰 고시생 주리 삼촌과 선생님을 통해 역사의 굵직한 고비를 간접 경험해 가면서도 그 의미를 실감하지 못하던 동구는 선생님이 5.18의 격류에 휘말려 실종되자 신문 정치, 사회면에서나 보던 사건이 남 일이 아닌 내 일임을 느끼게 된다. 세상과의 유일한 창이었던 박 선생님과의 이별 뒤, 갑작스런 동생의 죽음과 어머니의 광기 등 소설은 극적인 사건과 함께 결말로 치닫는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구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세계와 동구를 둘러싼 어른들의 세계인 두 개의 세계가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할머니와 엄마, 엄마와 아빠의 끊임없는 갈등, 군부독재와 민주화운동 같은 정치적 갈등들은 어린 아이인 동구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어른들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급기야 동구는 스스로 희생하기까지 한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역사의 질곡이 지나가는 동안 오직 자신이 지닌 선함으로 동그랗게 빛을 밝히는 동구에게 미안할 지경이다. 이 소설이 단순히 산뜻하고 해맑은 성장소설 이상의 성장소설인 이유다.   


당시 시대문화가 고스란히 읽히기도 한다. 가부장적 가치관을 가진 동구의 아버지는 가족 갈등에 관심이 없다. 남아선호사상에 찌들어 아들만 끔찍이 여기던 시어머니, 온갖 욕설을 받아도 묵묵하게 듣고만 있는 며느리의 고된 삶은 답답하기까지 하다. 항상 며느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할머니의 태도는 어린 동구에게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해맑은 동구마저 “엄마의 깔끔한 인생에 할머니는 거의 재앙과도 같은 천적”이라고 표현할 정도이니 말이다.  


1981년 기록을 끝으로 동구의 유년 시절 이야기는 끝이 난다. 동구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예상컨대 동구는 예전의 나약하고 구박만 받던 어린 아이는 아닐 것이다. 몸과 마음이 한층 성장하여 노루머리골에 내려가서 할머니를 잘 보살피고 씩씩하게 그의 삶을 잘 살아낼 것이다. 그리고 부디 동구가 무거운 짐을 벗어던지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정원의 모습은 이제 기억 속에 하나의 영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차가운 철문을 힘주어 당기며 나는 아름다운 정원에 작별을 고했다. 안녕, 아름다운 정원. 안녕, 황금빛 곤줄박이. 아름다운 정원에 이제 다시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나는 섭섭해 하지 않으려 한다.” -315p 


소설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정원’은 유년의 세계를 상징하는 모티브이기도 하다. 심윤경 작가의 등단작인 이 소설은 2002년 세상에 처음 나왔다. 인왕산 아래 산동네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 작가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을 발표하고 10년쯤 뒤, 한 독자가 "과연 동구는 행복했을까?” 라고 묻자 심윤경 작가는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동구가 가족에 퍼부은 사랑과 세상에 끼친 감동에만 만족했지 그 아이의 행복은 살피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희생하고 헌신해라, 가족은 무엇보다 소중하니 지켜라” 이런 가슴 아픈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던진 것이 아닌가 미안함을 느꼈다고 밝혔다.  


이후 동구에 대한 속죄의 의미를 담아 두 번째 성장소설 <설이>를 내놓게 된다. 설이는 순박한 동구와는 정반대로, 어른보다 세상 물정을 잘 알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나운 성격을 갖게 된 인물이다. 설이는 스스로 강하고 스스로 가족을 지켜낸다. 설이는 하고 싶은 얘기를 다 토해낸다. 되바라지고 못되게, 뻔뻔하고 인정사정없이 어른들을 할퀸다. 이런 설이를 주인공으로 세운 것은 주변 환경에 치이면서도 항상 가족에게 헌신했던 동구가 무력한 어린아이여서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사과로 풀이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페인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