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끌로이 Oct 12. 2022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페인트>


부모를 선택할 수 있다면? <페인트> 


국가에서 센터를 설립해 아이를 키워 주는 양육 공동체가 실현된 미래 사회, 나라에서 키운 아이들이 청소년이 되어 자신의 부모를 직접 선택하는 색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부모 면접'이라니. 발칙하고도 어쩐지 그럴듯해 보인다. 소설 <페인트> 속으로 들어가 보자.     


아이 낳기를 꺼리는 부부가 늘어나자 정부는 일단 낳기만 해라, 아이를 버리더라도 낳기만 하면 키우는 건 국가가 알아서 하겠다는 정책을 내놓는다. 단순히 양육보조금을 지급하고 세금 깎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정부가 직접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정책이다. 이들은 '네이션스 칠드런(Nation's Children)'이라 부르고 NC센터에서 키운다. 최첨단 시설을 보유한 NC센터는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버려진 아이들이 국가의 아이들로 거듭나는 셈이다.  


NC센터에는 신생아부터 청소년까지 다양한 연령이 있는데 13세부터 19세까지는 부모를 골라 선택할 수 있는 면접 권한이 주어진다. 제목 ‘페인트’는 부모 면접(parent’s interview)을 뜻하는 은어이다. 3차까지 면접을 모두 통과한 부모 지원자는 한 달간 아이와 합숙을 하며 평가받고 그 결과 최종 합격을 하면 비로소 입양 절차를 밟는다. 입양 이후에도 한동안은 정부의 지속적인 감독을 받는다. 절차가 까다로운데도 지원자들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정부 지원금 때문이다. NC센터의 아이를 입양하면 꽤 큰 금액의 지원금이 나온다. 그래서 큰 빚을 졌거나 노후 자금이 없는 부부들이 돈을 노리고 지원하는 악용 사례가 간혹 있다. 열아홉 살까지 입양되지 못하면 부모가 없는 채로 세상에 나가야 한다. NC 출신이라는 이유로 사회에서 차별받는 경우가 있어서 아이들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반드시 부모를 만나 안전한 가정에 소속되길 원한다.  


그런데 열일곱 살 소년 제누는 입양에 별 관심도 없고 시큰둥하다. 제누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부모에 대한 로망이 별로 없다. 뒤늦게 인위적으로 만난 부모 자식이 삐걱대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늘 의심한다. 그래서 제누는 면접도 무척 냉정하게 본다. 제누가 지원자들에게 100점 만점에 15점을 주면 정말 후하게 준 거라고 할 정도다.   


그러던 중 한 부부가 NC센터를 찾아온다. 그런데 이 부부, 다른 지원자들과 좀 다르다. 보통은 멀끔한 정장을 입고 와서 NC 아이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쓰는데 이 부부는 옷차림과 매무새가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다. “솔직히 아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번거롭잖아. 하지만 말이 통할 정도로 다 자란 아이는 다를까 해서.”라고 솔직하게 속내를 밝힌다. 게다가 입양을 원하는 이유는 본인이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는데 NC 센터를 재료삼아 소설을 쓰면 흥미로울 것 같기 때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동안 뛰어난 후보들을 모두 거절했던 제누는 모두가 자격 미달이라고 말하는 이 부부를 선택한다. 이유가 뭘까? 


“사회는 원산지 표시가 분명한 것을 좋아하잖아요. (중략) 대부분의 아이들이 가족한테서 가장 크게 상처를 받잖아. 내가 만약 우리 부모님 아래서 자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쯤 완전히 다른 성격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 105p 


소설을 읽으면서 묘한 쾌감이 든다. 누구나 부모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태어남을 당하고 선택권 없이 부모를 만난다. 태어나보니 언니, 오빠 주렁주렁 달린 가난한집 막내이더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페인트>는 기본 설정을 뒤엎어 한번쯤 상상은 하지만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판타지를 그리고 있다.  


열세 살 때부터 지금까지 4년 동안 페인트를 치러온 제누에게 남은 시간은 2년 남짓, 과연 제누는 원하는 부모를 만나 무사히 입양될 수 있을까? 궁금증을 안고 출발했다가 이내 제누를 응원하게 된다. NC센터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집약체다. 제누와 한 방을 쓰는 밝고 사랑스러운 아키, 껄렁해 보이지만 부모에게 입양되었다가 센터로 되돌아온 상처를 지닌 노아는 제누와 마찬가지로 페인트를 준비하는 조연들이다. 각자 원하는 부모상을 그리며 미래를 대비하면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소설 속에 들어가 함께 부모를 면접하고 고민하며 점수를 매기고 있다. 부모의 그늘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어려웠던 억압된 10대 시절로 돌아가 청소년의 시선으로 이 소설을 바라보게 된다. 


<페인트>를 쓴 이희영 작가는 소설 속에 나오는 것처럼 자신 안에도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가 있다면서 그 아이와 놀아 주는 일이 글쓰기이며, 무엇을 얻고 싶은 욕심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즐길 수 있는 과정이 기뻐서 글을 쓴다고 말한다. 부모가 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 아닐까. 자신이 바라는 아이로 만들려는 욕심보다 아이와의 시간을 즐기는 마음이 먼저다. 부모는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되어 가는 것이니까.  


좋은 부모란, 나아가 가족이란 무엇일까? 부모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일까? 완벽하게 준비된 부모가 있을까? 무수한 질문을 남긴채 마지막 책장을 덮었다. 세상 어떤 부모도 미리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준비를 완벽히 마치는 시점을 묻는다면 그 답은 요원할지도 모른다. 완벽한 타이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은 함께 배워가며 성장해가는 존재이므로.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시선으로부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