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끌로이 Oct 06. 2022

시선으로부터



시선으로부터 


이런 제사라면 해보고 싶다. 마지막 장을 넘기며 혼자 중얼거린 말이다. 정세랑, 하와이, 그리고 제사라니. 세 단어의 조합만으로도 이미 신선하다. 한국과 미국 가운데 지점인 하와이에서 결혼식을 올린다는 국제부부 사연은 종종 봤어도 젊은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곳에서 고인 제사를 지낸다는 사연은 처음이다.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주인공 심시선 여사로부터 이야기가 시작한다. 심시선 여사가 죽고 난 뒤 10주기가 되었을 때 맏딸 명혜가 갑자기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야 겠다고 선언한다. 고인은 생전에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그러나 명혜는 “붓다도 제자들한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누가 그말 듣긴 들었나? 온 아시아가 절로 뒤덮였지.” 라고 아주 쉽게 가족들을 설득시킨다. 상에 전과 명태포를 올리는 평범한 제사가 아니다.  


심시선 여사 후예들은 그곳에서 특별한 제사를 준비한다. 각자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한다.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심시선과 연결된 그들은 그녀에 대한 저마다의 기억을 가지고 하와이를 여행한다.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고, 서로를 배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가만히 지켜볼 줄 아는 사람들이지만 조금씩 아픔과 상처를 지니고 있는 그들은, 심시선 여사를 기리기 위한 여행에서 그녀에게 선물할 물건과 추억을 찾으며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심시선은 누구인가? 심시선은 한마디로는 모던걸, 즉 신여성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은 할머니 세대이지만 그 시대사람 같지 않다. 가족 중 유일하게 피가 섞이지 않은 딸 경아는 '그 시대에 있기 힘든 엄마였다'고 표현한다. 손님들이 꼭 오빠만을 두고 크게 될 놈이라고 칭찬할 때 엄마는 손님들에게 우리 딸들은 작게 될 년들이냐고 무안을 준다. 가족이 애정으로 똘똘 뭉치게 했던 장본인이자 가족의 가장으로서 평생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하면서 유명인으로 산 인물이다. 심시선 여사가 이렇게 성공하기까지 인생에 굴곡이 많았다. 그 시대의 여성 예술가들이 그랬듯이 억압과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를 겪으면서 홀로 뚝심을 지켜낸 여성이다.  


이런 심시선 여사를 기리기 위해 가족들은 저마다 특별한 것들을 준비한다. 누구는 중년의 나이에 훌라춤을 배우고, 누군가는 서핑에 성공해 파도를 담아 오겠다고 한다. 누구는 커피를 유독 좋아했던 심시선씨를 위해 원두를 종류별로 준비해 신중하게 내리는 연습을 한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이 집의 사위가 하와이 명물을 찾아 헤매다 말라사다 도넛이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네 개를 산다. 어떤 온도에서 가장 맛있는지 실험하기 위해 한 시간 간격으로 시간차를 두고 맛을 본다. 이내 도넛을 30분 안에 가족들에게 먹여야겠다고 다짐하고 자전거를 빌려 빵집에서 숙소까지 타이머를 재가면서 경로를 탐색한다. 무슨 가족이 이렇게 하나같이 제사상에 진심일까? 실소가 터져 나온다. 그렇게 각자 가져온 것들을 제사상에 한데 모아 놓으니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다채로운 상차림이 펼쳐진다.  


미술가이자 작가이며 시대를 앞서간 어른이었던 심시선. 그녀가 두 번의 결혼으로 만들어낸 이 독특한 가계의 구성원들은 하와이에서 그녀를 기리며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성장해나간다. 책에는 심시선 여사의 가족들 17명이 등장한다. 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관계를 설명하려다보니 특이하게도 소설 맨 앞장에 가계도가 그려져있다. 다양한 인물들만큼이나 사는 모양 역시 다양하다. 마냥 따뜻하고 유쾌한 가족 이야기인 것 같지만 막상 가족 한명 한명 인생을 조명하면 이들 또한 상처투성이 인생이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331p 


소설에서 정세랑 작가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다양한 문제들을 툭툭 건드린다. 전쟁과 역사, 인종차별, 페미니즘, 혐오주의, 생태주의 같은 주제들을 결코 무겁지 않게, 유쾌하게, 그러나 매우 현실적이고 자세하게 그린다. 사회면 뉴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지만 어딘지 모르지 모르게 아려온다. 이들이 가진 상처가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과 상당히 비슷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세대에 걸쳐 상처가 되풀이되는 모습을 보면 반복되는 역사와 우리네 인생이 겹쳐 보인다.  


정세랑 작가는 이 소설을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정의한다. 소설은 시대의 폭력과 억압 앞에서 순종하지 않았던 심시선과 그에게서 모계로 이어지는 여성 중심의 삼대 이야기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난 심시선과 20세기의 막바지를 살아낸 시선의 딸 명혜, 명은, 그리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손녀 화수와 우윤. 심시선에게서 뻗어 나온 여성들의 삶은 우리에게 가능한 새로운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 세대가 가장 힘들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역사를 돌아보면 그 어떤 때도 쉬운 인생은 없었다. 소설 속 심시선 여사의 말처럼 '모든 면에서 닮아 없어지지 않도록' 윗세대로부터 무언가 배우고 디딤돌삼아 살아가는 일이 우리의 몫인지 모르겠다.    


하와이 여행을 마친 심시선의 후예들은 지치지 않고 살아갈 것임을 암시한다. 소설 속 표현처럼 이 집안 여성들은 기가 센 것이 아니라 기세가 좋은 여성들이다. 무르고 유약해서 당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근성있게 잘도 일어나는 오뚝이처럼.   


 

매거진의 이전글 생각의 기쁨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