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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Nov 15. 2022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무슨 제목이 이래? 이 책을 집어 들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제목에 '슬픔'이 두 번이나 언급되고 있지만 이 책에서 중요한 내용은 슬픔이 아니다. 중간에 숨어있는 단어, '공부'이다. 책을 쓴 신형철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일은 곧 세상을 알아가는 일과 연결이 되는데 그것은 책과, 영화, 음악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p28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속 구절이다. 왜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지, 왜 어떤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그토록 무뎌진 것인지 궁금해질 때 이 책을 펼치곤 한다. 상대방을 이해하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고 인정하고 나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책이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으려면 그 작품이 그 누군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어야 한다.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이 책을 소개하고 싶은 이유는 따로 있다. 신형철 평론가는 이러한 인간의 한계를 인정은 하되 긍정하지는 말자고 외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다.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한다.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라고 묻는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타인의 슬픔을 향해 손을 뻗는 의지.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순간은 어쩌면 타인의 슬픔을 공부하려고 결심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가 어떤 책이나 영화를 보고 감동적이었다고 느낄 때 때로는 그 감동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기도 하다. 분명 좋았는데, 인상적이었는데, 명확하게 풀어내기 힘들다. 신형철 평론가의 책을 보면 그 막연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뀐다. 제대로 이해받았다고 느끼는 순간, 느낌표는 더욱 선명해진다.  


이 책은 신형철 평론가가 그동안 발표한 글 중 짧은 것을 모아 다듬고 묶어 펴냈다. 책머리에 "7, 8년 동안의 글을 모아보니 슬픔에 대한 것들이 많았다"며 "슬픔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 것은 2014년 4월 16일 때문이기도 하고 2017년 1월 23일 때문이기도 하다. 전자는 세월호가 침몰한 공적인 날짜이고 후자는 아내가 수술을 받은 사적인 날짜다.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일들을 나란히 놓는 것이 죄스럽지만 내게는 분리하기 어려운 두 번의 일이다"라고 했다. 슬픈 일들을 겪고 무참해져서 이제부터 자신의 알량한 문학 공부는 슬픔에 대한 공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할로윈 이태원 참사로 가슴이 아프다. 2022년 10월 29일 이후로 그의 평론세계가 또 다시 변곡점을 맞을지 모르겠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그러니 슬퍼하더라도 슬픔과 위안의 본질을 알고 슬퍼하자. 하물며 글을 쓸 때도 그렇다. 세상에는 교환 아닌 것이 별로 없으므로, 좋은 글을 얻고 싶다면 이쪽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내줘야 한다. 사람이 가진 가장 귀한 것은 생명인데 그것은 인생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시와 분의 형태로 분할 지불이 가능하다. 생명을 준다는 것은 곧 시간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위해 나의 시간, 나의 생명을 조금 나누어준다. 그 대가로 반짝반짝 빛나는 통찰력 있는 문장을 길어 올린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슬픔을 고찰하고 위안하기가 필요한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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