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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Dec 07. 2022

<죽음이 물었다> 아나 아란치스



  

나의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늘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질문이다. 갑자기 쓰러져 소독약 냄새 짙게 배인 중환자실에서 의식 없이 죽게 될까, 요양원에서 저승길 동지들과 함께 뜨개질과 산책으로 하루를 보내며 그날을 기다리게 될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지만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어 갈 수는 있다. 


어쩐지 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린다. 슬프고 무섭다는 막연한 감정이 앞서서일 것이다. 죽음은 금기어가 아니다. 깨끗한 죽음을 위해서는 대비가 필요하다. 브라질 완화의료 전문의 아나 아란치스 박사가 쓴 <죽음이 물었다>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하면 좋을지 알려주는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다. 가족 구성원이나 친인척의 죽음, 또는 반려동물의 죽음 등 형태가 다양하다. 살아 있는 생명이 끊어지는 것만이 죽음은 아니다. 친구와 관계가 끊기거나 다니던 직장을 은퇴해도, 심지어 건전지가 닳아 시계 바늘이 멈춰도 '사망했다'고 표현한다. 날마다 일상의 죽음을 경험하며 크고 작은 상실을 맞닥뜨리는 셈이다. 아나 아란치스는 상실을 덜 고통스럽게 하고, 삶을 의미 있게 하기 위해 바로 지금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완화의료 전문가. 생소한 직업이다. 세계보건기구에 따르면 완화의료란 ‘생명을 위협하는 질환과 관련된 문제에 직면한 환자와 그 가족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접근으로 조기 진단과 정확한 평가, 그리고 통증과 기타 신체적, 심리사회적, 영적 문제의 치료를 통해 고통을 미연에 방지하고 경감’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죽음을 생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죽음이 적당한 때에 찾아올 수 있다고 믿으며 그들이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돕는 의료 행위이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완화의료를 안락사와 연관시킨다. 말기 환자 진단이 내려진 후, 보호자들은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끝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걸 할까 봐 두려워한다. 이때 아나 아란치스는 환자와 가족, 의료진 모두에게 돌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한다. 삶의 끝에 이른 환자에게 자연스러운 죽음을 허가하는 처방전을 쓴다. 그렇다면 이제 진정제를 쓸 시간인가? 아니다. 아기들이 어떻게 태어나는지 생각해보면 쉽다. 아기들이 진정제를 맞고 태어나지는 않는다. 죽을 때도 진정제를 맞을 필요가 없다. 자연스러운 진통, 자연스러운 분만, 자연스러운 삶, 자연스러운 죽음.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반드시 필요하고 중요한 개념임에는 분명하다.  

아나 아란치스가 <죽음이 물었다>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사람들은 결국 살아온 대로 죽는다.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했다면 의미 있는 죽음을 가질 가망도 없다. 죽는 과정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울 수 있다. 특히 신성한 의식을 주재하는 의료 전문가들의 지식과 기술 부족이 고통을 배가시키는 어이없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숙달된 완화의료 전문가가 필요하다.  


지하철을 탔다고 생각해보자. 지하철에 오른 사람들은 그저 한 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있을 뿐이다.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이렇게 생각한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얼마나 걸릴까?” 삶은 눈가리개를 한 채 지하철을 타고 가는 것과 비슷하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장소로 들어간다. 어디서 내리게 될지도 모르고, 그곳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다 문이 열리고 누군가 외친다. “내리세요!” 누군가는 조금 빨리 열차에서 내리게 될 테고 누군가는 예상보다 훨씬 오래 열차 여행을 할지도 모른다. 앞으로 몇 정거장을 더 가면 내가 내릴 정거장에 도착하게 될까 상상하며 차례를 계산한다. 완화의료는 그 목적지로 가는 과정이 즐겁고 보람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는 시간이 가로놓여 있다. 삶은 우리가 그 시간 동안 행하는 것이며, 우리의 체험이다. 날이 저물기를, 주말을, 휴일을, 은퇴를 기다리며 삶을 보낸다면 죽음의 날이 더 빨리 오기를 열망하는 것이다. 삶은 일이 끝난 후에 시작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을 사는 것’은 특정 순간이나 삶의 즐거움에 맞추어 켜고 끌 수 있는 스위치가 아니다. 즐겁든 그렇지 못하든 우리는 100퍼센트의 시간을 산다. -93p  


<죽음이 물었다>는 당신은 지금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른 말기 환자들이 반복적으로 쓰는 단어가 '후회'이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후회는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남이 기대하는 삶을 산 것이다. 실제로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아온 환자들은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한다. 안타깝게도 후회 없는 마지막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급작스럽게 준비할 수 없다. 살면서 계획하고 만들어가야만 한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얻는 법을 배우는 데 공을 들인다. 다른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물건이나 혜택, 이득을 얻어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수많은 강좌를 듣고, 책을 보고, 기술을 익힌다. 이렇듯 무언가를 얻는 기술에 대한 가르침들은 무수히 많지만 잃는 법에 대해서는 서툴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잃는 법을 알고 싶어진다. 소중한 것은 지키고, 잃어야 하는 것은 기꺼이 잃는 삶, 고통을 새로운 출발의 도약으로 삼을 수 있는 삶, 스스로 조절하는 삶을 '좋은 삶'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죽음까지도 인생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현재를 고민하는 시간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귀하지 않을까.  


아나 아란치스는 책에서 몇가지 생각할 거리를 제시한다. 의사가 환자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환자가 매우 심각한 중병을 앓고 있어도 죽음에 관련된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꽤 있다. 아나 아란치스는 가족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사전의료의향서(혹은 생전 유서)를 만들었다. 건강할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도 과거보다 높아졌고 관련 지침도 많이 보완되었다. 이제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사회 전체가 비상식적이고 불필요한 고통에서 벗어날 때이다. 


더불어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성숙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은 우리를 동굴 입구에 데려다 놓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날 당신은 동굴로 들어가고, 들어간 길로는 동굴에서 나올 수 없다. 그가 죽기 전과 똑같은 삶은 이제 찾을 수가 없으니까. 죽음 이후 당신이 접하게 될 삶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을 때와 같을 수가 없다. 그 애도의 동굴을 떠나려면 스스로 출구를 만들어야만 한다. 누군가를 불러 애도의 동굴에 함께 들어가고 그 사람에게 당신 대신 출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아픔은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데 그렇게 삶을 재건하는 과정을 겪고 나면 한뼘 성장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15p
109p


207p

*세계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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