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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Feb 27. 2023

옷의 말들



 


대학교 입학식 때 입은 재킷, 첫 월급 받고 샀던 캐시미어 코트, 여행지에서 즉흥적으로 고른 털모자... 지금 내 옷장을 보면 내가 살아온 삶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사람의 옷장도 궁금해진다.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평소 출근할 때 모습과 집에 있을 때 모습이 얼마나 차이 나는지 그 사람의 옷장 풍경으로 짐작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패션지 '보그'의 간판이자 영국 잡지계의 전설적인 편집장이라면 어떨까? 그 옷장은 단순히 한 개인의 역사에서 나아가, 옷이 어떻게 시대의 모습을 담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주제가 된다. <옷의 말들>은 '보그' 최장기 편집장을 지낸 알렉산드라 슐먼이 옷과 삶에 대해 쓴 에세이다. 


이전에도 언제나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옷이 단순한 천 조각 이상이라고 느껴졌다. 꽃무늬 원피스와 인디고색 셔츠, 체크무늬 코트를 볼 때면 이들을 입고 내가 살아가게 될 더 온전하고 발전된 삶이 보인다. 이들은 매우 신나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들어가며」중에서


‘2018년 겨울, 내 옷장을 열고 그 안에 있는 것들을 세어 보았다. 코트 22벌, 원피스 35벌, 파티 드레스 5벌, 재킷 34벌, 치마 37벌, 분류하기 모호한 상의 7벌….’ 세계적 패션 잡지 ‘보그’ 창간 이래 가장 오랜 기간 영국 보그의 편집장을 지낸 알렉산드라 슐먼(65)은 편집장직을 내려놓은 이듬해 우연히 옷장을 열었다. 패션 잡지 기자 특성상 그에게 옷은 단순한 의복 그 이상이었다. 옷과 직업상 깊은 연관을 맺었던 그는 25년간 일했던 보그에서 물러난 후에야 “수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진심으로 내 옷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옷장 속 아이템에서 영감을 받아 이 책을 썼다. 


옷은 뭐니 뭐니 해도 기능이다. 아이를 돌볼 때는 편한 옷이, 권위 있어 보이고 싶을 때는 질감 좋은 재킷이 좋다. 추억도 환기한다. 좋은 날 입었던 옷은 그날의 기억을 떠오르게 한다. 옷은 사회 변화도 담는다. 처음에는 남성 아이템이었던 타이츠는 여러 단계를 거쳐 지금은 여성의 전유물이 됐다. 책은 이렇게 방 한구석에 있는 옷장 속 옷이 어떻게 우리가 사는 세계와 연결돼 있는지를 보여준다. 


슐먼 편집장은 이 과정에서 여성의 일과 삶, 살면서 얻는 다양한 정체성, 사회 변화, 개인의 실패와 성공을 기록한다.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예술가를 동경했던 청소년 시절부터 유능한 직장인, 잡지사 간부 그리고 아내, 엄마로 살아온 저자의 개인적 경험도 겹겹이 담겼다. 옷을 입는 방식은 무엇보다 삶을 향한 태도와 연결돼 있다고 강조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내 옷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궁금해져 당장 옷장부터 열게 된다. 


집에 비슷한 옷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계속해서 사게 되는 스타일의 옷이 있다. 나름의 취향인 셈이다. 반면 옷을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옷들도 있다. 내가 이걸 왜 돈 주고 샀을까 후회가 밀려온다. 그렇게 한번 굵은 채로 걸러낸 옷장에는 좋아하는 옷, 자주 입는 옷, 추억이 있는 옷, 비싼 옷만이 생존해있다. 시간이 흐른 뒤에는 조금 더 고운 채로 진짜 내가 좋아하는 옷들만 남겨놓는다.  


슐먼의 옷장을 살짝 엿보자. 유능한 커리어 우먼이었던 이모가 사준 첫 정장은 새로운 시작을 향한 격려와 지원을 해주는 존재였다. 낡고 오래된 옷이지만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단단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행사용 드레스는 다음에 같은 옷을 또 입을 확률이 낮다. 그러니 특별한 날을 위한 일회용 옷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날을 위해 기꺼이 시간 내서 옷을 고르고 돈을 지불한다. 좋아하는 원피스들은 바라만 봐도 신이 난다. 원피스를 입었던 그날 저녁의 분위기와 우리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기억할 수 있게 한다.  


슐먼은 옷장에 걸려 있던 패션 아이템 하나하나에 질문을 던진다. ‘왜 구매했을까’ ‘이들을 입고 어떤 기분이 들기를 바랐던가’에서 시작해 ‘우리가 입는 옷을 보며 세상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로 확장한다.  


빨간 구두, 앞치마, 액세서리, 트렌치코트 등을 소재로 삼은 글은 대개 옷에서 출발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과 사회, 세상을 향한다. 임부복 챕터에서는 깡마른 몸매가 아닌 사이즈 14(XL)로 보그 편집장을 지낸 일화를 전한다. 브래지어 챕터에서는 그가 브래지어를 처음 착용했던 1969년과 2010년에 브래지어를 보는 여성의 관점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한다. 흰색 셔츠 챕터에서는 특정 패션이 어떻게 사회 질서와 권위, 전문성을 상징하게 됐는지를 추론한다. 


옷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막상 '옷의 말들'을 읽다보면 우리가 선택하고 입어온 옷으로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말해준다. 옷이라는 인생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우리의 옷장은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옷장은 아직 여유 공간이 충분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옷으로 인생을 채워나가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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