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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Feb 22. 2023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


 


“Open the pod bay doors, HAL.(격납고를 열어, HAL.)”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나온 대사다. 이 작품이 나온 1960년대에는 인간이 기계에 명령을 내린다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그건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 공상과학이었다. 하지만 60여년이 흐른 지금, 인간이 AI에게 바둑을 지고, 투자마저도 AI가 하고, 글과 그림 같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영역마저 프로그램이 대신하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이야기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됨을 우리는 자주 목격해 왔다. 그렇다면 영화에서 묘사되던 대로 지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량한 벌판만 남은 채 폐허로 변해버릴까? 


한바탕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지구, 다가올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있을지 궁금하다. 조해진 작가가 쓴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는 지구 종말을 맞는 다양한 8개의 시선을 담은 연작 소설이다. 첫 번째 <X-이경>은 미지의 행성 X가 지구와 충돌할 것이며 그 경우 인류가 생존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의 상황을 그린다. 한 달 안에 지구가 행성과 충돌하고 세상이 멸망한다면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느냐고 묻는다. 사귀고 있는 사람과 계속 만날 것인가, 직장에 계속 출근할 것인가, 미련이 남아 있는 예전 애인을 다시 찾아갈 것인가.  


이어지는 두 번째 소설 <X-현석>은 이경의 전 연인 현석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서술한다. 이경, 현석 사연과 마찬가지로 서로 연결된 작품이 <귀환>과 <종언>이다. <귀환>은 사고로 손상된 뇌 부위에 칩을 이식한 아들을 위해 3개월 후 귀환 예정인 우주 왕복선에 탔다가 16년을 우주에서 보낸 엄마 은정의 이야기를 그린다. <종언>은 어느새 어른이 된 은정의 아들 수호가 자신처럼 혼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살아온 소년 승재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귀환>에서 마침내 지구로 돌아가게 된 은정은 무사히 지구에 도착했을까,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들 수호를 다시 만났을까. 궁금증을 잔뜩 남긴 채 짧은 소설을 마친다.  


시리즈 중 배경 설정이 가장 엄혹한 <가장 큰 행복>이 인상 깊다. 식량과 물자가 부족하자 사람들은 이기심과 폭력성을 거침없이 드러내기 시작한다. 더 이상 인류애는 남아있지 않고 생존을 위한 본능만이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온순한 성품을 지닌 두 남자가 서로에게 의지해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예정되지 않은 미래를 그리며 차곡차곡 쌓아온 이야기가 절망과 체념을 동시에 느끼면서 삶을 영위해내는 지금 우리들과 닮았다. 


이곳에선 한 명 한 명이 국가이자 난민이고 공평하게 가난하니까. 최악은 지나갔다는 안도와 곧 진짜 최악이 오리라는 불길한 예감 사이에 이 세계는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 p127  


2254년, 인류의 마지막 영토가 된 돔 안을 배경으로 한 <CLOSED>에서는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한 더욱 깊은 고찰이 드러난다. ‘생명 연장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신체 조건은 사십대에 고정된 채 233년째 살아 있는 넬은 외딴 셀 안에서 외부와의 교류 없이 우울에 시달리는 알코올중독자다. 유일한 대화 상대인 로봇 수행원 HN0034는 매일같이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센터에 데이터를 보고한다. 어느 날 넬은 사실 이 돔 안에 사람이라고는 자신뿐일 것이라며 의문을 제기한다. HN0034는 넬의 말을 망상이라고 일축하면서도 혹시 생명 연장을 중단하고 싶은 건지 묻는다. 스스로 숨을 거두는 행위조차 선택할 수 없는 세계에서 어쩌면 최후의 인류일지도 모르는 넬은 영원한 고독의 공포와 마주하는데... 


이따금 부조리에 부딪힐 때마다 염증을 느낀다. “인간은 다 사라져야 한다”라고 읊조린다. 인류를 멸망시킬 힘도, 능력도 없기에 머릿속으로 상상만하고 만다. 이 관념에 머무르는 주제를 활자로 풀어낸 책이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이다. 각자 독립되어 있는 에피소드를 한 데 묶은 단편집의 주인공과 사연은 제각각이지만 시리즈를 관통하는 메시지는 공통적이다. 비일상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세계에서 인물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불안이 그대로 전해진다.   


〈우리에게 허락된 미래〉는 저주받은 걸작이다.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 일찍 도착한 작품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며칠 전, 한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20대 또래들이 기후 위기를 둘러싼 인터뷰를 한 영상이다. 기후 우울증의 유무를 아냐는 질문이 오갔는데, 그 단어를 납득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후 위기와는 심리적인 거리가 멀 수도 있다. 미래에 내가 살 터전이 무너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상하지 못할 만큼, 현생에 치인 까닭일 터다. 이 소설은 기후 우울증과 멸망의 메커니즘을 깊이 드러내는 작품이고, 앞으로 우리가 대처해야만 할 병적인 슬픔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이토록 리얼하다니 소설보다는 차라리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투모로우〉같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기후위기를 단순 장애물로만 묘사하고 늘 그렇듯 미국적인 영웅이 등장해 인류를 구원하는 긍정적 메시지를 남긴다. 하지만 조해진 작가가 그린 미래 사회는 마냥 낙관적이지 않다. 작가는 오히려 소외된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등장시켜 자기 몫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돕는다. 연민보다는 체온만큼의 온기를 나누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자는 그의 진심 어린 호소가 든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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