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끌로이 Jul 16. 2024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나의 결혼식이 열렸어야 했던 날, 형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그해 가을, 나는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 두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그렇게 한동안 고요하게 서 있고 싶었다." 


남부럽지 않은 대형 잡지사 ‘뉴요커’에서 전도유망한 기자로 일하며 치열한 일상을 보내다 돌연 미술관 속으로 숨어버린 남자. 사람들이 “왜?”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짧게 답한다. 끔찍한 상실감에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마냥 누워만 있을 수는 없다. 당장 먹고, 자고, 입는 데에 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 수도, 죽을 수도 없기에 조용하게 몸을 숨기기 위해 미술관을 택한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가장 단순한 일을 한 패트릭 브링리의 자전적 에세이다. 10년 동안 7만 평이 넘는 공감에서 300만 점의 작품과 연 700만 명의 관람객을 만나면서 반복한 일상, 마주친 사람들, 함께한 그림들에 대한 감상을 빼곡하게 담았다.  


브링리는 매일 8시간씩 거장의 혼이 담긴 예술품을 지켜봤다. 경이로운 회화와 조각부터 고대 이집트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위대한 걸작들과 오롯이 교감하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깨닫고 멈춘 인생을 다시 살아나갈 힘을 얻었다고 한다. 동시에 그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동료 경비원들과 친해지며 서서히 마음을 연다.  


미술관 경비원이라고 하면 흔히 꿀보직이 자동 연상된다. 관람객의 돌발 행동을 제지하고 간단한 질문에 답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몸이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없다. 그의 언뜻 순례자와 같고, 미술관은 형의 죽음을 애도하는 수도원 같다. 허무하게 형을 잃고 산산이 부서진 마음은 수백 년 전 위대한 예술가들이 남긴 걸작 속 사람들이 든든하게 지켜줬다. 브링리는 '우리와 다름없이 오류투성이인 다른 인간들이 세상을 어떻게 해석해 왔는지를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미술관이라고 말한다. 


병세가 심해져 대화도 제대로 못했던 형이 어느 날 치킨너깃을 먹고 싶다고 정확하게 말을 한다. 그 길로 가족들은 뛰쳐나가 맨해튼 밤거리로 깡그리 뒤져 치킨너깃을 한 아름 사들고 돌아와 나눠먹는다. 그렇게 가족들은 침대를 둘러싸고 최선을 다해 사랑과 슬픔과 웃음이 가득한 소풍을 즐긴다.  


이 장면은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 ‘곡물 수확’을 떠올리게 한다. 지평선 너머 항구와 황금빛 들판을 배경으로 나무 아래서 농부 몇 명이 식사를 즐기는 모습을 담은 이 그림은 형이 누워있던 병실과 겹쳐진다. 고전 명화 속 풍경이 사실은 누구나 겪어봤을 흔한 광경이고, 수 세기 전 생존했던 작가의 시선과 2024년을 사는 우리의 삶이 포개어진다는 사실이 그를 위로했다.  


매년 7백만 명이 방문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전시품만큼 눈이 가는 건 이를 마주하는 관람객들의 표정이다. 관람객을 관람하는 브링리의 시선을 따라가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특징 없어 보이는 단순 관광객부터, 딱 봐도 시크하고 도도한 뉴요커, 미취학 아동을 데리고 공룡을 찾으러 다니는 공룡 사냥꾼 유형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그중 아메리카 전시관 분수대 앞에서 아이에게 동전 두 닢을 쥐어주며 소원을 비는 어머니의 말이 가슴을 울린다. "하나는 네 소원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네 소원만큼 간절한 다른 누군가의 소원을 위해서." 


그 말을 듣고부터 브링리의 눈이 달라진다. 전시실 안 낯선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다. 선한 얼굴, 매끄러운 걸음걸이, 감정의 높낮이, 생생한 표정들, 그들은 어머니의 과거를 닮은 딸이고, 아들의 미래를 닮은 아버지다. 그들은 어리고, 늙고, 청춘이고, 시들어가고, 모든 면에서 실존한다.  미술관을 헤매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각자의 삶을 헤매며 의미를 찾는 예술가들 같아 보인다. 


슬기로운 경비 생활 속 흘러간 10년 동안 그는 기나긴 애도의 터널을 가까스로 빠져나온다. 그 사이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도 생겼다. 이제 슬픔이나 그리움 같은 감정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당장 책임져야 할 처자식이 삶의 우선순위가 됐다. 하지만 브링리는 그런 변화가 마냥 아쉽지만은 않다고 말한다. 육아야말로 완벽하지도, 완성되지도 않을 일생의 프로젝트일 테니까.  


예술이 삶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브링리와 동행해보자.  





매거진의 이전글 왜 너는 편하게 살고자 하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