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처음 경험했던 수련회는 중학생 때였다. 친구들과 낯선 장소로 떠나는 데서 오는 설렘, 산속 방갈로에서 칠흑 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억, 해병대캠프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혹독하게 흙바닥을 구르는 훈련 등 1박 2일 여정 동안 온통 난생 처음 겪어본 일 투성이었다.
수련회의 꽃은 사후체험이다. 당장 죽는다 생각하고 유서도 썼었다. 꽤 진지하게 울며불며 써내려갔다. 일기장 속에 숨겨둔 비상금을 유산으로 남기겠다는 맹랑한 소리를 곁들여서. 유서를 가슴에 품고 관에 누워보기도 했다. 바닥이 차가워서 불편했을 뿐 생각보다 아늑했다. 적어 내려간 유서는 캠프파이어 시간에 훨훨 태웠다. 재가 되어 날아가는 유서를 보면서 내 몸이 죽으면 이렇게 사라지게 되려나 생각했다. 죽음을 마냥 무서운 일로 여기다가 이때 처음으로 아쉽고 덧없다고 느꼈다.
분명 죽음은 슬프지만 동시에 아름다울 수도 있다. 프랑스의 세 번째 여자 랍비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손녀인 델핀 오르빌뢰르는 <당신이 살았던 날들>에서 고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자신의 일을 '죽은 이들과 함께 살기'라고 부른다. 작가는 많은 날들을 죽은 이들을 배웅하고, 남은 이들을 위로하며 보냈다. <당신이 살았던 날들>은 상실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작가는 오로지 죽음과 함께할 때라야 더 강렬하게 와 닿는 삶의 본질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단순히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살아 있음에 안도하게 되는 마음과는 다르다. 우리의 삶이 죽음에 빚지지 않고서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깨달음에 가깝다. 죽음 앞에서도 “레하임LeH’ayim”(삶을 위하여!)을 외치는 유대인들은 어쩌면 바로 그 점을 의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죽음에 관해 말하고 있지만 웰 다잉(well-dying), 아름답고 평화롭게 삶을 마무리하는 법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작가는 마치 든든한 묘지기처럼 무덤가에 앉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이 가진 회한과 슬픔, 죄책감과 두려움을 다독인다.
아무도 죽음에 대해 말할 줄 모른다. 아마도 그것이 죽음에 대해서 내릴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정의일 것이다. 죽음은 말을 벗어나는데, 죽음이 정확히 발화의 끝에 도장을 찍기 때문이다. 그것은 떠난 자의 발화의 끝일 뿐 아니라, 그의 뒤에 살아남아 충격 속에서 늘 언어를 오용할 수밖에 없는 자들의 발화의 끝이기도 하다. 애도 속에서 말은 의미작용을 멈추기 때문이다. - p.139
한국어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어에도 자식을 잃은 부모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 우리는 부모를 여의면 고아가 되고, 배우자를 잃으면 과부나 홀아비가 된다. 그렇다면 자식을 잃었을 때 우리는 뭐가 될까? 마치 명명하지 않으면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고, 그 미신을 따라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단단히 입단속을 하는 것만 같다.
유대인들은 무덤을 꽃으로 장식하는 대신 작은 조약돌을 무덤 위에 올려놓는다고 한다. 금세 시들고 마는 꽃과 달리, 조약돌은 무덤가에 머무르며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죽고 나서 매장되는 순간까지 시신 곁에 촛불을 켜둔다. 촛불은 죽은 자가 내뿜는 영혼의 빛을 상징한다. 몸은 죽었으나 영혼은 아직 살아서 며칠간 눈부시게 존재를 드러낸다.
살면서 우리는 무수한 죽음과 마주친다. 어느새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참석할 일이 잦아진다. 얼굴을 내밀고, 부의를 전하고, 고인께 예를 표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밥 한 그릇 먹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애도는 작게 오그라들고, 예의만 앙상히 남은 듯 한 장례 풍경이 사뭇 민망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마음의 짐을 조금 덜었다. 작가는 장례식장을 찾아 유족을 만나고, 그 곁에서 함께하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어로 ‘거룩한’을 카도시(kadosh)라 하는데, 카도시는 본래 ‘구별되다’란 뜻이다. 장례를 치르면서 죽은 이를 애도하고 기억하며, 남은 자를 위무하는 이 시간은 구별되는 시간이다. 일상의 시간이 끊어지고 새로운 시간이 열리는 까닭이다.
이 책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에게 섣부른 위로를 건네지 않는다. 슬픔을 털고 일어나라고 말하기보다, 그 슬픔의 의미를 곱씹게 한다. 애도란 죽은 자의 삶을 충분히 말하는 행위다. 빈소에서 나누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여전히 그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 역시 언젠가 이야기로 남아서 누군가의 인생 비단에 짜인 크고 작은 문양이 될 테다. 그러니 장례가 영혼의 빛으로 인생 비단을 짜는 거룩한 시간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