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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뚫기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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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나의 수명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수 있다면, 그런 게 가능하다면, 나는 여생의 절반쯤을 한 알의 캡슐로 응축하고 싶다. 그걸 영양제 통에 슬쩍 넣어두고 아침에 엄마가 꺼내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내 삶이 엄마의 삶이었으면 좋겠다. 엄마가 나보다 하루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 - p.177


소설은 작가와 독자의 기싸움이다. 만들어낸 가짜 이야기라 해도 그 안에 작가의 모습이 알게 모르게 투영되는데, 민낯을 어떻게든 들키지 않으려는 자와 기어이 알고 싶은 독자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랄까.


그런데 여기 밀당을 포기하고 자신을 거침없이 보여주는 식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다. 박선우의 <어둠 뚫기>이다. 삼십대 남성으로 살면서 겪은 여러 에피소드들이 마치 패치워크처럼 서로 맞물리며 뻗어나가는 소설이다. 주인공의 여러 요소 중 가장 비대한 조각은 직장인이다.


주인공 나는 출판사 편집자이다. 뭇 직장인들이 그렇듯 야근과 주말 근무를 반복하며 피로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직장에서 실망과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업계를 떠나거나 이직할 마음을 먹지는 않는다. 첫 직장이었던 증권사에서 더 최악의 경험들을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퇴근 후 남자 직원들끼리 모여 술을 마시는 자리에 끌려갔었고, 성적인 농담과 희롱이 난무하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비단 회사생활만 힘든 것이 아니었다. 나는 학창시절, 군대, 회사에서 모두 ‘남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조롱을 당했다. 스스로에게 “내가 남자야?”라고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은 “정말이지 내가 그들과 같은 종속이라 느낀 적이 살면서 단 한순간도 없었다”이다. 그러나 타고난 몸은 남자이기에 어느 집단에도 제대로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한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피곤하게 하는 것은 바로 삼십칠 년간 엄마의 집을 떠나고 있지 못한 게이라는 점이다. 엄마에게 두 번이나 커밍아웃을 했으나 엄마는 지독하게 아들을 외면하며 "언제 결혼하냐"고 물어온다. 아들의 우울증을 감수성 과잉이나 의지박약인 것처럼 대한다.


애증으로 엮인 모자는 과연 평온하게 공생할 수 있을까. 소설은 커밍아웃을 한 남성 동성애자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마라는 존재를 이해해보려 애쓰는 이야기다. 작가 자신의 이야기인 동시에 자기혐오라는 어둠을 뚫고 나가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엄마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었다면 나는 나를 덜 미워했을까? 상처 입은 자식들이 늘 품게 되는 질문이다. 우리 안의 상처들이 오롯이 엄마의 잘못으로 생긴 게 아님을 알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었지만, 그래서 엄마를 안쓰럽게 여기는 순간들도 더러 있지만, 그럼에도 어떤 원망은 결코 해소할 수는 없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일찍 결혼한 엄마, 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두 아들을 길러야 했던 엄마, 평생 미싱사로 일하느라 손이 굽은 엄마,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된 엄마, 코로나로 실직한 엄마. 그리고 오래전 어느 날, 삶이 너무 버거워 연탄불을 피워놓고 동반 자살을 시도한 엄마. 이토록 폭력을 휘두르던 엄마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안다. 내가 죽고 싶은 만큼이나 엄마도 죽고 싶었으리라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죽지 않고 두 아들을 지켜냈다. 슬픔을 끌어안은 채 살아가겠다는 의지 표현으로 보인다. 주인공 나는 이제 있는 그대로의 엄마와 함께 살아가는 연습을 조금씩 하기로 한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사랑하기’라는 유구한 미션은 나와 엄마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엄마에게 나는 불쌍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존재고, 물론 그건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러다 또 어느 날, 전화를 끊기 전에 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너무 죽기 살기로 그러지 말자.” 주어는 모호하지만 나에게 하는 말임과 동시에 엄마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안다. 서로가 서로인 것이 고통인 만큼 서로가 서로에게 삶이자 빛임을 이해한다.


물론 노력한다고 갈등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엄마가 하루아침에 바뀔 리 없고 사회에 만연한 혐오 역시 여전할 것이다. 다만 가로등 빛을 머금고 활짝 피어난 백목련만으로도 우리는 희미한 빛을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그 빛에 기대어 계속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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