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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고작 계절

by 끌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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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에 도착하면 늘 계절을 먼저 눈치 챈다. 이색적인 거리 풍경과 모르는 문자로 써진 표지판들, 처음 마주한 냄새와 공기. 그래서 여름이 되면 낯선 곳에 여행 갔던 기억이 떠오르고, 비슷한 온도와 습도인 날은 그 여름 휴가지에서의 추억에 잠긴다.


미국에 도착한 그 해는 혹독하게 추운 겨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겨울은 단순한 계절이 아니었다. 마치 나의 전 생을 뽑아내고 새로운 껍질 속에 욱여넣는 듯 한 시간이었다. 계절은 그렇게 기억을 묶어두는 힘이 있다.


김서해의 장편소설 <여름은 고작 계절>은 과거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는 유난히 뜨겁고 유예된 계절 속에 갇혀있다. 주인공 제니는 IMF를 갓 벗어난 2000년대 초, 열 살에 부모님의 결정으로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이민하게 된다.


백인 아이들은 동양인 여자아이에게 모질기만 하고, 제니는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를 깎고 마모시켜 적응해나간다. 필사적으로 영어를 배우고 친구들 사이를 맴돌며 가까스로 손바닥만 한 자기 자리를 만들어낸 어느 여름, 한국에서 이민 온 한나가 나타난다. 따돌림을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길 요구하는 한나. 제니는 자신과 같은 처지인 한나를 안쓰러워하면서도 적응하지 못하는 그를 한심하게 여긴다.


어느새 제니는 자신이 그토록 미워했던 백인 아이들과 비슷해져간다. 아이들에게 미움 받는 한나와 가까워지는 것은 곧 무리에서 다시 한 번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았다. 제니는 완벽하게 미국 아이가 되고 싶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춤을 추듯 백인의 몸짓과 말을 흉내 낸다. 하지만 한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니처럼 영어를 잘하고 싶다며, 친구를 많이 사귀고 싶다며 제니에게 다가온다.


입학한 첫해 동안 일기를 쓸 때마다 서럽다는 말을 영어로 뭐라고 하는지 수없이 고민했다. 서럽다는 ‘sad’와 달라서 더 길고 구체적으로 묘사해야 했다. 서러움은 억울함이 잔뜩 섞인 답답한 슬픔이었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가 밑바닥에 자글자글 깔린, 그런 슬픔이었다. - p.26


그 장면들을 읽으며 자꾸만 오래된 내 모습이 떠올랐다. 완벽한 문장 조합이 아니면 입을 떼지 않았던 지난날. 내 발음과 억양이 트집잡힐까봐 어설프게 말을 하느니 차라리 입을 닫아버리는 선택을 했었다. "너 어디서 왔어?"라는 간단한 질문에도 한참 망설이면서 머릿속으로 이런 저런 대답을 만들었었다. 어쩌면 나도 제니처럼 혼자가 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 미국인처럼 보이려 애쓰지 않았을까.


제니와 한나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를 반복하는 동안 찾아온 세 번째 여름. 두 사람은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백인 여자아이들이 초대한 호숫가 모임에 가게 된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오직 제니만이 물 밖으로 걸어 나오고, 한나는 호숫가에 쓰러져 있었다. 제니는 호숫가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있는 한나를 죽도록 팼다. 제니는 한나에게서 자신이 갖고 싶었던 자존감과 용기를 느끼지만, 동시에 한나의 자유로운 태도가 위협처럼 느껴졌다. 동경과 질투, 불안이 폭발해 돌이킬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이 결말은 두 이민자 소녀의 우정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친구이지만 타인이기도 한 존재였고, 서로를 통해 자신을 비추고 서로의 그림자를 훔쳐보는 오묘한 관계였다. 서로가 되지 않으려고 밀어내면서도 동경한다. 그 관계 속에서 이른바 '같은 처지'로 인식한 이민자들의 우정이 얼마나 날카롭고도 애틋한지를 새삼 느꼈다.


한나는 제니에게 말한다. “넌 날 좋아하는 게 아니야. 그냥 너 자신을 싫어하는 거지.” 그 말은 이민자의 심장을 관통하는 진실이었다. 우리의 자기혐오가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을 향한 오해로 번졌는지, 어떻게 외로움이 질투로, 질투가 폭력으로 변모했는지 너무 잘 아는 감정이어서 더 아프게 다가온다.


미국에서 살아온 시간 동안 나도 제니처럼 많은 계절을 보냈다. 영어로 잠꼬대를 하고, 속어에 웃고, 다양한 피부색이 익숙해지게 되었지만, 누군가가 불쑥 영어로 말을 걸어오면 아직도 마음이 한 번 덜컥한다.


<여름은 고작 계절>은 그런 나에게 말해준다. 우리가 지나온 여름은 단지 계절이 아니었으며 그 안에서 만들어진 흔적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진짜 이야기였다고. 그 여름을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깊은 위로와 격려를 보내며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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