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 TV를 켰다. 화면 오른쪽 귀퉁이에 '연인(The Lover)'이라고 쓰여 있다. 무엇을 기대한 것도 아니었고, 사실 제목만 보고는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화면에 펼쳐진 어린 소녀와 한 남자 사이의 숨 막힐 만큼 관능적인 풍경만 눈에 들어올 뿐.
내 또래로 보이는 소녀의 얼굴에 깃든 어른스러운 고독, 적나라한 촬영 방식, 위험해 보이는 관계에 충격을 받았다. 어린 나로서는 그들 사이를 이해한다기보다는 금기와 에로티시즘의 색으로만 소비했던 것 같다.
그리고 성인이 된 후, 다시 영화를 찾아보았다. 이번에는 영화가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식민지 시대에 계급·인종의 벽 위에 놓인 사랑, 그리고 소녀가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이 보였다. 특히 영화 속에서는 카메라가 소녀의 몸을 탐닉하는 동시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중국인 남자의 고독한 표정을 자주 비춘다. 두 사람 모두 상처 입은 존재였고, 둘 다 욕망과 두려움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어릴 땐 보지 못했던 이 고독의 무게와, 짧고 격렬한 관계가 한 사람의 인생에 남기는 흔적의 깊이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았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 원작 소설을 읽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은 영화와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영화는 사건과 인물의 외형에 집중된다면 소설은 철저하게 주인공 소녀의 내면과 기억에 초점을 맞춘다. 시간이 뒤섞인 회상의 구조, 마치 속삭이듯 짧고 단호한 문장들, 그리고 노년의 화자가 과거의 나를 바라보는 차가우면서도 연민 어린 시선이 인상적이다.
소설 속 나는 과거 중국 남자와의 사랑을 ‘아름다웠다’고도, ‘지옥 같았다’고도 정의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자기 인생의 한 부분이자,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고 고백한다. 마치 사랑은 옳거나 그른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영화가 시각적으로 보여주던 관능과 고통을 소설은 활자로 한층 더 깊고 복잡하게 펼쳐 보인다.
책장을 덮고 나면 “사랑이었나?”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남는다. 처음에는 외설적이고 낯선 장면으로 다가왔던 이야기였지만, 나이가 들어 조금은 성숙해진 후에 다시 보니 그들은 단순한 스캔들이나 원조교제가 아니었다.
<연인>의 배경은 1920년대 베트남, 정확히는 호찌민시 메콩강 유역이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다. 주인공 나는 베트남에서 태어나 자란 프랑스계 백인이다. 주인공 가족은 백인 식민 지배층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이다. 아버지는 병으로 일찍 사망했고, 어머니는 프랑스 정부의 식민정책으로 베트남에 파견돼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큰아들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인격 장애를 앓고 있다. 큰오빠는 나태하고 무능한 난봉꾼이고, 형에게 맞고 살다가 전쟁에 나간 작은오빠는 이질로 죽는다. 가족들은 사업 실패와 부채로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주인공 남자는 중국계 부자이다. 당시 베트남에는 큰 화교 공동체가 있었고, 이들은 무역·은행업·부동산·상점 등을 통해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남자는 아버지가 물려준 부를 상속받았지만 프랑스인 식민 지배 구조 안에서 완전한 주류가 될 수 없는 경계인이다.
소설은 각기 다른 이유로 소외된 남녀의 사랑을 통해 영원히 섞일 수 없는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백인 식민 지배자 계급에 속해 있으나 가난한 프랑스 소녀, 부유하지만 차별을 받는 중국인 남자의 사랑은 당시 시대가 단순히 나이와 인종의 금기만 존재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소설은 마르그리트 뒤라스 작가가 노년에 찾아온 간경화와 알코올 중독을 이겨내고 발표한 자전적 작품이다. 짧은 시간 동안 잊지 못할 기억을 남긴 남녀의 사랑과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야 진심을 알게 된 서툰 감정표현 방식이 인상 깊다. 작가의 감정선을 따라 독자 역시 나이대에 따라 주인공 입장이 각기 다르게 다가온다.
<연인>은 그렇게 내 안에서도 두 번의 시선과 한 번의 독서로 점점 깊어졌다. 처음에는 충격, 그다음엔 이해, 그리고 마지막엔 공감과 슬픔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는 누군가 내게 “그건 어떤 이야기였어?”라고 묻는다면,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분명, 오래 기억에 남는 이야기였다”고 답할 것 같다.
그는 그녀를 생각하며 슬퍼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그는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 사랑할 거라고. - p.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