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장을 정리하다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다. 책등은 바랠 대로 바래, 햇살에 씻기고 먼지에 덮인 세월의 자국이 선명했다. 우리 집에 이런 책이 있었던가.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 표지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는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라고 시작한다.
인간 중심의 세계를, 이름조차 없는 고양이의 시선으로 통렬히 비튼 이 작품은 1905년에 발표해 100년이 넘은 고전이지만 여전히 낯설고도 신선했다. 첫 문장은 마치 세상을 갓 인식한 존재가 던지는 철학적 선언처럼 느껴진다. 인간 세계에서 이름이란 정체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고양이는 이름이 없다. 주인도 없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 고양이는 오히려 관찰자로서 세상의 본질을 꿰뚫는 날카로운 입을 지녔다.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우리가 얼마나 이름과 소속이라는 틀에 집착하는지 새삼 깨달았다. 사회에서 역할과 직함, 소속된 집단을 통해 정체성을 확인하고, 모든 것이 벗겨졌을 때 과연 나는 누구인가 혼란스러워진다. 이름 없는 고양이의 고고한 시선은 그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소설에서 사람 주인공은 구샤미 선생이다. 세상 이치를 구분하지 못하고 고집만 드센 선생은 나쓰메 소세키 본인을 투영한 인물이다. 그가 위장병을 앓는다거나 곰보라는 점, 작가가 이 소설을 기고한 잡지에 구샤미 선생도 투고한다는 대목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을 관찰하고 비꼬는 고양이 역시 작가를 형상화한다. 말로는 온갖 훈수를 두면서 결국 쥐 한 마리 잡지 못하는 무능함이 비슷하다. 그런 비겁한 성정 탓에 본인이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고 고양이의 입을 통해 에둘러 풍자하고 있다.
고양이는 관찰자 입장에서 일본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 사회, 허영, 위선을 풍자한다. 인간 세계를 날마다 들여다보면서도, 그 복잡한 감정과 허위적 언행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꾸미고, 체면을 위해 진심을 숨기고,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인간들. 나 역시 이민자로서 다른 문화권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때로는 이해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가까이 있지만, 결코 같지 않은 사람들. 그들과 섞이려는 노력 끝에, 오히려 나 자신을 잃는 느낌도 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인간 사회를 이렇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존재가 고양이라는 것. 고양이는 개와 함께 사람과 가장 가까이 공존하며 교감하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한 발 떨어져 인간을 가장 정확하고 치밀하게 분석할 수 있는 존재다. 인간 사회에 속하지 않고, 소속되려 애쓰지도 않으며, 그저 창가에 앉아 묵묵히 인간을 관찰하는 그 시선이 어쩐지 이민자로서 미국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과도 겹쳤다. 어딘가의 일원이지만 완전히 속한 듯하지 않은, 살짝 비껴선 자리에서 세상을 보는 느낌이랄까.
이 소설에는 시종일관 묵직하게 지식인의 무력함에 대한 씁쓸한 반성이 흐른다. 구샤미 선생처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배운 것을 흉내 내고, 말은 그럴듯하지만 실천은 없는 모습은 지금의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있다. 과연 나는 말과 삶이 일치하는 사람인가? 문득 돌아보게 된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을 다루면서도 나쓰메 소세키는 특유의 유머와 문장 유희로 웃음을 선사한다. 특히 고양이 특유의 고상하고 거만한 말투는 이 소설의 백미다. 아무리 진지한 문제라도, 한 발짝 떨어진 시선과 유쾌한 문장이 더 깊은 울림을 주는 법이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 p.612
고전에는 시대를 관통하는 공통된 메시지가 있다. 인간이 인간을 보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 밖의 존재가 인간을 보는 방식으로 사회를 비출 때 어떤 모습인지 한번 되돌아보자. 그 날카롭고 정직한 시선이 조금 부끄러울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시선은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에도 변화를 준다.
이 소설을 통해 나는 이름 없는 고양이처럼 나 자신을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사람과 사회를 관찰하는 시선을 가지되 거기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지켜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이 고양이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큰 지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