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일기장을 본다는 건. 소설책을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쾌감이 있다. 은밀한 사생활을 엿본다는 관음적인 생각에 더 호기심이 커진다. 30대 후반 남자의 일기는 어떤 내용일까?
<보통의 존재>(사진)는 특별한 것 없는 보통의 남자가 겪은 경험과 생각을 담은 책이다. 인생에 있어 하고 싶은 일이나 애착 같은 것 없이 되는 대로 살아오던 남자가 38살이 되던 해, 사랑과 건강을 한꺼번에 잃고 비로소 삶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
‘보통’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흔한’이라는 단어로 바꿔 쓸 수 있다면 사실 이 남자는 전혀 일반적이지 않다. 밴드 ‘언니네 이발관’의 리더이자 기타리스트 이석원.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그는 꽤나 어둡게 살아왔다. 경계성 인격장애와 우울증으로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해 있었고, 결혼 6년만에 이혼했다. 온 가족이 정신병력을 갖고 있고, 그의 형제 넷 중 셋이 자살시도를 했다. 게다가 궤양성 대장염을 앓고 있어 고기는커녕 김치조차 먹을 수 없게 된 남자다. 그의 인생은 전혀 일반적이지 않지만 그가 쓴 일기는 묘하게도 구석구석 공감 투성이었다.
친한 사람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기 어려운 이 남자는 누군가에게 속을 털어놓는 대신 일기를 썼다. 왜 그럴 때 있지 않은가. 친구에게 고민을 얘기하고 싶은데 막상 말하자니 어디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할 때. 누가 내 사정을 듣고 함부로 동정할까 봐 겁날 때. 술 한잔 하고 싶은데 누군가를 불러내기는 늦은 시간이고 혼자 마시기는 싫을 때. 이석원 작가는 그런 순간에 일기장을 펼쳤다. 아무렇지 않은 듯 덤덤하게 풀어나간 그의 이야기는 묘하게 친근하다.
하루의 단상을 정리한 글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심오해서 ‘이사람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쓸데없는 오지랖이 생겨나기도 한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나만 아픈 건 아니구나. 모두 보통의 존재들이고 보통의 아픔쯤은 있구나.’하고 위안을 얻게 된다.
특히 집을 공간과 시각, 감정적으로 풀어낸 부분이 와 닿는다. 어렸을 때 이석원 작가의 집은 9명의 식구가 방 네 개를 쪼개서 살았다. 대가족에 불만은 없었지만 내 공간에 대한 동경은 늘 있었다. 그에게 집이란 쉬거나 안식을 구하는 곳이 아닌 불안 속에 안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곳이었다고 회상한다. 이혼 후에는 방 세 개짜리 단독주택에 혼자 살고 있다. 집에 들어왔을 때의 고요함, 따뜻함, 포근함을 즐긴다. TV를 켜고 드라마를 보며 자세를 흐트러뜨릴 때의 그 자유로운 행복감은 세상을 다 가진듯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외로워진다. 시계를 보니 딱 2시간 반이 지났다. 집이란 공간이 그에게 고요함과 평온함을 주는 공감에서 외로움을 주는 공간으로 바뀌기까지 딱 150분이 걸렸을 뿐이다.
혼자 사는 남자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이렇게 소름 끼치게 공감한 적이 있던가. 사람이 이렇게 간사한 존재인가 새삼 씁쓸해진다. 간절히 바라던 평온이 150분만에 외로움으로 바뀌는 허무한 감정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라 보통의 존재라면 누구나 갖는 보통의 것이라는 것에 안도했다.
‘보통의 존재’는 구질구질해 보이는 글들도 꽤 있다. 어린 조카 눈을 피해 몰래 과자를 먹는 모습,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해 돈을 모아 혼자 레스토랑에 가는 모습, 늙은 어머니와 소리지르며 싸우는 모습. 그런데 그의 구질함 조차도 불쌍하게 궁상맞아 보이지 않고 솔직한 보통 사람으로 비춰진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살다 보니 ‘특별’은커녕 ‘보통’만큼이라도 살아가는데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보통 같은 집에서 보통만큼만 아프고 보통만큼만 기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일기를 썼었다. 그러다 “어제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여서 쓸 말이 없더라”는 핑계로 어느 순간 일기장은 빈 공책이 돼버렸다. ‘보통의 존재’를 읽고 나서 아주 오랜만에 다시 일기를 쓰고 싶어졌다. 따분한 일상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활자화되는 순간 의미가 달라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