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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끌로이 Jun 21. 2017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



“사랑합니다.” 이 한마디가 덧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가슴은 더 많은 감정을 만들어내고 있는데 입 밖으로 토할 수 있는 단어는 고작 ‘사랑’이 전부일 때. 한 사전에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어느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머리에서 안 떠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 상태. 성취하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솔직하게 잘 파고든 정의가 아닐까.

  

사람들이 책상을 책상이라고 부르기로 약속한 이래 지금껏 꾸준히 지켜오고 있는 것처럼 단어가 가진 힘은 대단하다. 미우라 시온 작가의 소설 <배를 엮다>(사진)는 이 특별한 작업을 하는 출판사 사전편집부가 주요 무대다. 이야기는 천재적인 언어 감각을 가진 남자 마지메가 사전편집부에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새로운 사전 ‘대도해’를 편찬하는 작업인데, 수록 예상 단어만 24만개. 편집 방침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맞는 사전’이다.   


대도해 사전 만들기는 15년에 걸쳐 진행된다. 그 사이 세상은 종이와 잉크가 존재 가치를 잃어가고, 궁금한 것은 무엇이든 인터넷 검색 한번이면 가능한 디지털 세상으로 바뀌었다. 그 때문에 사전편집부도 여러 번 위기를 맞지만 흔들리지 않고 한 권의 사전을 만드는데 인생을 바친다.  


사전을 만드는 작업은 사람들이 쓰는 말을 채집하는 일이 출발이다. 책상처럼 영겁의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책상인 단어가 있는 반면 ‘꿀피부’, ‘꽃중년’ 같이 새로 생긴 단어들도 허다하다. 의미가 달라진 단어들도 더러 있다. 국어사전에서는 ‘연애’를 ‘남녀가 서로 그리워하고 사랑함’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미국 모든 주에서 동성결혼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아버지가 둘인 가정, 어머니만 둘인 가정이 늘어나고 있는 현재, 동성 간의 특별한 감정은 설명할 길이 없다. 이렇게 시대 흐름에 맞춘 보편타당한 단어 설명을 위해 기존의 단어들도 다시 점검해야 한다.  


이 소설은 대도해 사전이 탄생하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줌과 동시에 이 시대의 직업관을 조명하고 있다. 주인공 마지메는 모든 것이 서툴다. 말주변도 없고 행동도 느리다. 요령 피울 줄도 몰라서 맡은 일은 잠도 자지 않고 해낸다. 마지메는 ‘유원지 놀이기구 중에서 관람차를 제일 좋아합니다. 조금 쓸쓸하지만 조용히 지속되는 에너지를 감춘 놀이기구여서.’라고 말한다. 이 두 문장으로 마지메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 가능하다. 처음에는 마지메의 행동이 미련스럽게 보이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존경심이 생긴다.   


무언가를 열심히 하지만 융통성이 부족한 사람을 세상은 조롱하고 놀린다. 마지메도 처음에는 ‘특이한 녀석’이라고 따돌림을 당했다. 하지만 고집스러울 정도로 묵묵하게 자기 일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고 사전편집부 사람들도 점차 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5년동안의 긴 여정을 마칠 즈음에는 성실하다는 건 좀 멋없지만 재미있다고 각자 마음속으로 깨닫게 된다.   


특별하지 않은 출판사 사전편집부 사람들의 삶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각자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해내는 그들의 모습은 열정적으로 몰두할 수 있는 일이 가진 가치를 알려준다. 무언가를 위해 성실히 일하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를 알려준다. 대도해 편찬을 마친다 해서 그들에게 큰 부와 인기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한 우물을 판 결과는 정년 퇴임의 명예 정도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열정을 쏟은 이유는 성취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전 이름은 왜 ‘대도해(大渡海)’는 일까? 말의 바다를 건너는 배라는 뜻이다. 사람은 사전이라는 배를 타고 어두운 바다 위에서 작은 빛을 모은다. 더 어울리는 말로 누군가에게 정확히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만약 사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드넓고 망막한 바다를 앞에 두고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전편집부는 바다를 건너는데 어울리는 배를 엮기 위해 대도해를 만들었다. 인류가 삶을 계속하는 한 쓰는 말은 끊임없이 사라지거나, 뜻이 변하거나, 새롭게 생겨날 것이다. 사전을 만드는 일은 어쩌면 그 시대를 한 권의 단어로 압축해놓는 작업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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