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야, 문제를 다 찍어다 바쳤는데도 그걸 틀리냐!
양심이 있냐?
예전엔 학생들 영어 시험 준비시키면서 별별 소리를 다 했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문제를 점쟁이처럼 찍어서 예상문제라고 묶어 주는데도 틀려서 오더라는 것이다. 화딱지가 나고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났다. 그러면 돈 받고 가르쳤다는 이유로 죄인이 돼서 학부모 앞에서 낯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쉬웠다. 발등에 불 떨어진 놈들, 성적 올리려고 애가 탄 분들, 기초가 탄탄한 분들을 상대했으니 방대한 자료 정리와 반복 훈련으로 아무리 머리가 단단한 제자들도 내가 포기하지 않으면 어찌 됐건 만족할 만한 결과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주변 엄마들이 아이 영어를 어떻게 가르칠 거냐고 묻기 시작했다. 내가 여태 해 왔던 일은 수능, TOEIC, TOEFL, OPIC와 같은 시험 준비를 위한 영어와 영문법인데 이제 막 기저귀 빼고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들에게 Mother Goose 들려주고 노부영을 틀어주며 영어 노출을 해야 한다니 나의 동공도 지진이고 뭐가 맞는 건지 헤매게 됐다.
그렇다고 나도 완전히 넋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어 노래도 틀어주고 전문가보다 더 전문가스러운 엄마들이 인터넷에 올려주는 엄마표 영어도 몇 개 해 봤다. 정말 나의 적성에 맞지 않았다. 시험 앞두고 미친 듯이 문제풀이를 하던 선생이 아무리 내 새끼지만 되지도 않는 율동을 하며 "트윙클, 트윙클, 리를 스따아~" 하려니 술이라도 한 잔 마시고 해야지 맨 정신으로는 힘들더라는 것이다. 오히려 영어 강사라는 전직이 새끼 교육에는 장벽이 되었다.
아... 그럼 내가 뭘 해 줄 수 있을까?
율동하며 노래하고 챈트 하는 건 몸에 뭐가 막 나는 거 같아서 안 되겠고 일단 책이라도 매일 읽어주기로 했다. 책을 읽어주며 시간이 지나면 뭔가 길이 보이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태도였다. 뉘 집 아이는 그림책 읽다가 한글을 깨쳤다더니만 혹시 영어책 읽어주다가 그런 로또 같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영어 그림책은 실로 놀라웠다. 시작은 '마음이 따뜻해지고 쉬운 그림책을 매일 읽어주자. 마르고 닳도록 읽어주자.'였는데 읽다 보니 영문법의 보물상자였다. 쉬운 내용과 상세한 그림으로 아이는 굳이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스토리를 이해했다. 대단한 것은 그림책에 나온 문법들이 어마어마하게 다양했다.
이거, 얼라들 책 맞아?
어떤 책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 어렵게 배웠던 내용을 쉽게 툭 뱉는다. 그리고 그 책 한 권을 다 읽는 내내 반복한다. 아이를 위해 영어 그림책을 읽기 시작하다가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영어 배우고 싶어도
시간 없어, 돈 없어, 정신없어서 못 배우는 엄마들이 알면 좋겠다.
영어 그림책을 통한 영문법은 그렇게 시작했다. 영어를 좀 아는 엄마가 내 새끼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에게 영어 그림책을 읽어주고 싶은, 영어 빼고 완벽한 엄마들을 위해서 말이다. 용기를 내자. 이제 와서 수능을 다시 볼 것도 아니고 영작문을 줄줄이 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며 재미있게 살살, 아이와 함께 성장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