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비 혐오증 환자의 커밍아웃
주차의 신, 와이키키에서 무너지다!
나에게 지병이 하나 있다. 아직 커밍아웃을 안 해서 그렇지 숨어있는 많은 환우들이 공감해 주리라 믿고 용기를 내어 고백하려 한다. 바로 주차비를 낼 때면 갑자기 어지럽고, 배가 아프고, 속이 쓰린 '주차비 혐오증'이다. 주차비 외에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은행 수수료와, 연체료 그리고 범칙금이 있는데, 하와이에서 주차비만큼은 마음을 비우고 다녀야 한다. 그런데 그게 환자에게 쉽냔 말이다.
빅아일랜드 여행을 준비하기 위해서 한국 여행사를 찾아 나선 날, 바로 그 날이었다. 출발 전에 이곳의 위치를 찾아보니 와이키키에서 제일 복잡한 중심에 있는 것이다. 보아하니 차를 가져가면 딱 고생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깟 지도에 굴할 나도 아니었다. 설마 내 차 세울 자리 없겠냐는 근자감으로 시동을 걸었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어딜 가도 주차는 자신 있었다. 그러나 오만함이 화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익명의 제보에 의하면 T 갤러리아 면세점에 무료 주차가 가능하다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몰라서 차를 세우기 수월하다나 뭐라나. 의아했지만 기쁜 소식이었다. 이미 트롤리를 타고 가 본 곳이기도 하고 우리의 목적지와 아주 가깝기 때문에 그곳에 차를 세울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트롤리가 들어오는 진입로로 차를 몰고 들어가니 주차장은 보이지 않았고 뒷좌석에 어린 두 분은 Endless 싸움 중이셨다. 아무리 조용히 하라고 해도, 엄마가 지금 주차할 곳을 찾아야 한다고 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 분들이 싸우는 내용도 들어보면 참 기가 찼다.
“나 오늘 고양이 세 마리 봤다.”
“나는 네 마리 봤거든.”
“아니거든, 오빠가 아까 본거는 고양이 아니거든.”
“맞거든”
“아니거든”
“맞거든”
이런 쓰잘데기 없는 싸움이 계속될 때, 내 마음은 차를 어디 세워놓고 소리라도 한바탕 지르고 싶지만 일단 주차를 해야 하므로 집중 또 집중했다. 설마 내 차 하나 구겨 넣을 곳이 없겠나. 제발 나와라 나와하면서 말이다. 주차장 입구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니 경비원이 나와서 위로 올라가라며 손짓한다. 나는 주차장 입구 표시도 없고 이거 엉망이라며 계속 구시렁거리었다. 뒷좌석은 피만 흘리지 않았지 이미 전쟁터와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 일단 주차부터 하고 뒷좌석 파이터들을 손 볼 생각이었다. 2층으로 올라갔다. 상황은 점점 불길해졌다. 2층에 차가 진입하는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때 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주차할 자리가 없는 것은 예상했는데 빠져나갈 길도 없었던 것이다. 몇몇 차들이 좁은 길목에 서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된장, 자리가 없으면 그냥 나가시던가 기다리려면 어디 한쪽 편에 차를 예쁘게 세워 놓고 있어야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내 차는 불안하게 경사면과 평지에 반반 걸쳐져 있었다. 물론 뒷좌석은 변함없었다. 내 고운 입에서 육두문자들이 발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날 이때까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내 차 넣을 곳은 있다고 믿고 살았던 내가 좀 당황스러워졌다. 그리고는 슬슬 아줌마 성격에 발동이 걸렸다. 나는 차에서 내려 앞에 서 있는 차로 갔다. 그리고 용감하게 창문 좀 열어보라고 했다. 검은 피부의 하와이 오빠는 기다리는 동안 심심하셨는지 힙합 음악을 고막 터져라 틀어 놓으셨다. 가뜩이나 이 아줌마도 전시 상황에서 쌈닭 되기 일보직전이었는데 그분의 청취 음악은 나에게 갱스터랩으로 들려왔다. 괜히 더 열 받았다. 내 심장까지 쿵쾅거렸다.
“너 지금 주차 자리 기다리는 거냐? 그러면 옆으로 좀 빠져줄래? 자리가 있어야지 내가 나가지 않겠니?”
첫눈에 이 누나의 머리에서 스팀이 나오는 줄 알았는지 의외로 친절하게 차를 빼줬다. 그렇게 몇 대의 차를 옆으로 치우고 겨우겨우 T 갤러리아 주차장에서 탈출했다. 자, 이제 어디다가 주차를 해야 할까? 근처 로열 하와이안 센터로 가 보기로 했다. 여행 책자에 따르면 로열 하와이안 센터는 유료이지만 좀 저렴하다고 했다. 10불 이상 쇼핑을 하거나 식당을 이용할 경우 주차 확인을 받으면 첫 번째 1시간은 무료이고 그 이후로 두 시간은 시간당 2불이라고 했다. 그러니깐 우리 셋이서 밥 먹고 여행사 볼 일 보는데 3시간이라고 가정하면 4불이면 된다는 얘기다. 그래, 주차비 좀 낸다고 우리 살림 거덜 나는 것도 아니니 속 편하게 가자. 서둘러 내비게이션에 '로열 하와이안 센터'라고 찍고 출발했다. 그런데 내비게이션의 말대로 잘 따라가니 로열 하와이안 센터 앞까지 안내는 하는데 주차장이 안 보이더라는 것이다. 게다가 칼라쿠아 애비뉴는 one way(일방통행) 이기 때문에 U턴도 못하고 주차장을 찾아서 돌고 또 돌았다. 이럴 때는 저 뒤에서 싸우는 두 분 말고 의식 있는 멀쩡한 한 분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옆 자리에서 주차장이라도 찾아주면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잠깐 차를 세워 놓고 싶어도 모든 차선이 다 흐르고 있다. 그나저나 정말 너네 오늘 왜 이러는 거야?
[그나마 좀 착한 로열 하와이안 센터 주차장, 나선형으로 올라가도 폭이 넓어서 별로 어렵지 않아요.]
그렇게 와이키키는 자칭, 타칭 ‘주차의 신’의 명성에 생채기를 냈다. 더불어 내 속에서 나온 두 놈은 엄마의 참을성을 수 차례나 들었다 놨다 반복했으며 주차장에서 길 막고 있던 하와이 오빠들도 미웠다. 이래저래 머리에서 지진이 나고 있었다. 날이 설대로 섰다. T갤러리아에서 탈출한 차는 결국 흐르고 흘러서 칼라쿠아 애비뉴의 끝자락까지 왔다. 뒷좌석 파이터들도 이제 지치는지 조용해졌다. 시종일관 이 두 분의 대화라고는 80%의 말도 안 되는 싸움과 20%의 고자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또 이런 식으로 적막이 흐르면 이건 또 뭔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난다. 순간 룸미러로 아이들을 확인했다. 아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정말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런데 그다음 문제는 나였다. 아이들이 좀 조용해지니 내 차례가 온 것이다. 나는 아이들한테 막 퍼 붓기 시작했다. 너희들은 왜 그런 일로 싸우느냐, 엄마가 말을 했으면 좀 들어라, 엄마가 혼자서 힘들어하는데 왜 도와주지는 못하고 힘들게 하느냐 등등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멈추고 싶었지만 일단 시작된 잔소리는 다 쏟아져 나와야 제어가 가능했다. 그리고 나니 좀 부끄러웠다. 나도 아이들처럼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 paraphrasing(이해하기 쉽게 다른 말로 바꿔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뒷좌석 파이터들은 순식간에 전우가 되었다. 바짝 엎드려서 엄마의 속사포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더 현명한 엄마였다면 여행사야 오늘 가도 되고 내일 가도 되는데 온 김에 그냥 우리 해변에서 놀다 가자고 했을지도 모른다. 주차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순간 버럭 해 버렸다. 그렇게 모두가 엄숙한 분위기로 와이키키를 몇 바퀴째 돌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6시가 다 되어 갔다. 여행사에서는 퇴근 준비하고 있을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 계속 계산기가 돌아갔다. 차라리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것이라면 여행사 근처에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이 속 편했을 것을, 몇 푼 아낀다고 이 고생인가 싶었다. 오늘만 살 것도 아닌데 왜 꼭 바로 처리해야 한다고 밀어붙였을까. 나의 행동을 돌이켜 생각해 보니 여행사에 일을 보는 게 목표가 아니라 주차헬(hell)인 와이키키에서 기어코 무료주차를 해 내겠다는 쓸데없는 고집이었던 것 같았다. 오늘 하루 고양이를 세 마리를 봤든 네 마리를 봤든 중요하지 않은 것과 다를 게 없었다.
남편과 화상 통화를 하면서 그날의 하이라이트를 보고했다. 나는 종군기자 인양 아이들이 차에서 벌인 전투에 대해서 생생하게 전했다. 엄마가 운전하는 내내 한 시도 쉬지 않고 싸웠으며 소리 지르고 울어서 귀가 떨어져 나가는 줄 알았다고 넋두리를 했다. 그런데 남편은 나를 위로하기는커녕 웃기만 한다. 실컷 떠들고 나니 뒷좌석 파이터들의 고자질 DNA의 유래를 찾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돈 모아서 노후에는 와이키키에서 주차 빌딩 사업을 하자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나의 지병도 사라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