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혼인신고를 하러 갔는데 공무원이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도 해주지 않아서 속 상했다는 SNS 글이 논란이 되었다. 반응은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운가, 공무원들 너무한다는 입장과 그 사람들에게는 일상적인 일이니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으로 나뉘었다.
내가 애써 의견 표명을 하자면 세상은 넓고 다양한 케이스가 있다. 출생신고도 축복받을 일이고 혼인신고 또한 그러하지만 아이를 조산하여 출생했다가 출생 직후 사망하기도 하는 등 우리가 예측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기에 말을 줄여 민원인들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 주려는 상황을 피하고자 함이기도 하다.
나 또한 사무적인 공무원이 되는 것이 하나의 목표이다. 왜냐고? 너무 힘들어서.
세상 모든 일이 나의 일 같아서 너무 힘들다.
근무 중에는 물론, 퇴근 후 심지어는 주말까지도 생각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번은 내가 입사 초기에 만났던 기초생활수급자 할머니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건 내가 아이를 낳고 복직을 하였을 때니 아마도 5년 만이었으리. 하지만 이름만 보아도 해사하던 그녀의 얼굴, 말투 그리고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를 정도로 그녀는 내게 친근한 존재였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곱게 분칠을 하고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실버카를 밀며 관공서를 방문하기도 하던 그녀는 미혼이었다. 공부상 뿐만 아니라 그 시절에는 흔하던 후처로 생활한 적도 없었던 완전한 싱글. 슬하에 자녀 또한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기댈 존재는 형제였다. 늘 우리에게 대구에 있는 언니, 동생 이야기를 하며 밝게 웃어주었다.
그런 그녀가 무연고자가 되었다. 형제들이 시신인수를 거부했다고 하였다. 문득 대구에 있는 형제들도 형편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는 어르신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생계가 힘들면 그럴 수도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도 형제들 이야기만 하면 밝게 웃으며 행복해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면 다시 눈물이 났다.
시신인수포기각서에 빼곡히 기록된 형제들의 서명에 결국 눈물이 터졌다. 사무실에서 엉엉 울었다.
원망할 수는 없지만 속상했다. 어떻게 형제의 시신을 포기할 수 있어. 할머니가 얼마나 좋아했는데. 할머니는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죽고 나서 형제들이 자신의 시신인수를 포기할 거라는 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며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라도 납골당을 찾아서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 담당자에게 물어보니 시신인수포기각서를 작성한 무연고자의 시신은 장례식 없이 화장처리 되며 화장 후 화장터 뒷산에 뿌려진다고 했다. 세상에 그녀를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안치해서 보관할 수 없느냐는 질문에 예산 문제도 있고 이미 오랜 시간 보관하고 있는 유골들조차 관리가 되지 않아 더 이상은 힘들어 처리 방식이 변경된 것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한동안 이 일로 몹시 슬펐다. 집에 돌아와서도 남편을 붙잡고 울었고,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그녀가 떠올라 눈물이 난다. 종종 그녀가 살던 집 앞을 지나갈 때도 그녀의 모습이 떠오르고 보고 싶다.
이런 일들을 겪을 때마다 매번 일에 감정을 좀 빼고 더 사무적으로 바뀌어야지 하고 다짐하지만 8년 차가 넘은 지금도 쉽지 않다. 세상 모든 일이 나의 일 같고, 세상 모든 민원인들의 일이 내 일 같다. 모두가 행복해지면 좋겠다.
모두가 행복해지면 내 직업이 없어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들 행복하실 수만 있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모두의 하루가 안녕하시길, 모두가 행복하시길 오늘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