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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Dec 14. 2020

역지사지의 역지사지

새벽잠을 설치며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심하다 꺼낸 말


아침에 말하면 왜 하루 기분을 망치냐고 할까 봐

출근 후 카톡으로 얘기하면 일하는 데 방해된다고 할까 봐

퇴근하고 술 한 잔 하며 주절대면 술김에 주정 부린다고 할까 봐

어느 시점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문장과 단어와 톤까지 고심하며 털어놓은 말


내가 무성의하거나 

무책임한 게 아니라면

모두의 지탄을 받아야 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나의 육아 자존감을 건드리는 말은 하지 말아 줘 

나는 이만큼 하는데, 당신은 왜? 하는 뉘앙스는 하지 말아 줘 

아무도 나만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제발 그러지 말아 줘 

못한다고 비난하거나 빈정대지 말아 줘 

부족한 게 보이면 다독이고 이끌어줘  


결국 이렇게 말하지도 못했지만 

정리되지 않은 감정 두서없이 늘어놓고 말았지만 


주문 밀린 카운터의 알바생처럼 

"알겠고요, 빨리 다음" 하는 것 같은 표정에 

마음의 산이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그래도 당신을 사랑해 

당신을 사랑하고, 이해해 


당신이 힘든 감정을 쏟아내면

나는 그러지 않을 거라 다짐

하다가

그러다가 

문득 생각해 보니 

당신은 나에게 그런 적이 별로 없네??? 


사소한 서운함은 그냥 묻고 또 묻고

이게 정답인가 

마른 땅을 뚫고 나오는 좀비처럼 솟구치는 서운함이

나는 너무 무서워 


힘듦을 말하는 나의 방식이 문제일까

힘듦을 말하는 나의 횟수가 문제일까 


나라면 안 그래! 하다가 

역지사지의 역지사지의 역지사지의 

무한루프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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