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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저기요 Feb 18. 2021

진선배는 뭐할까

진선배는 00학번이었다. 빠른 82이고 두 살 위였는데 그냥 82 언니들보다 어른스러웠다. 같은 과 선배였고 문학회 회장이었다. 01학번 언니들은 나중에 진선배가 빠른 82였다는 걸 알고 벙쪄했다. 동갑인데 몇 년간 선배 대접을 했던 게 억울해서였다.


진선배는 키가 크고 늘씬했다. 마른 체형인데 글래머러스했다. 눈에 띄게 예쁘진 않아도 매력 있는 얼굴이었다. 단발이 잘 어울렸고, 수수한 옷차림도 멋스러웠다. 목동에 살고, 외고를 나왔고, 어릴 때 아르헨티나에서 산 경험이 있다고 했다. 삼 남매의 맏이라 그런지 리더십도 있었다.


진선배는 00학번 국문과 퀸카 3명 중 한 명이었다. 세 명 다 늘씬하고 스타일리시하고 공부도 잘했다. 한 언니는 아버지가 교수라 했고, 다른 언니는 졸업하고 일본에 가 산다고 했다. 셋이 함께 있으면 뭔가 가까이 가기 힘든 아우라가 풍겼다.  


진선배는 노는 것도 잘했다. 동아리 사람들끼리 클럽에 간 적 있는데, 팔랑팔랑 뛰면서 춤추는 모습이 너무 매력 있었다. 외국 남자가 다가와도 놀라지 않고 적당히 거절하는 것조차 자연스러웠다. 나는 갖지 못한 자연스러움이었다. 말년휴가 나온 군인마냥 어색해서 구석에서 병맥만 홀짝이고 있었으니. 진선배는 어떤 자리에서도 스스로 빛나는 사람이었다.


오래 사귄 남친도 본 기억이 난다. 소년 같은 인상이었는데 진선배를 많이 좋아했다. 술이 떡이 된 언니를 데리러 학교 앞 허름한 주막에 와서 묵묵히 앉아 내 술주정까지 들어줬다. 착한 사람이네, 선배가 저런 사람과 사귀는구나. 남들은 잘 모르는 선배의 이성 취향을 알게 돼 조금 기뻤고 재밌었던 날이었다.


졸업 후 진선배는 내가 정말 가고 싶어했던 영화 월간지 기자가 됐다. 중학교 때부터 꼬박꼬박 구독해온 잡지였다. 조니 뎁, 이완 맥그리거, 디카프리오 같은 배우들이 표지를 장식했던, 매달 설레는 맘으로 부록까지 챙겼던 바로 그 잡지. 나는 그 잡지 기자가 될 수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진선배는 심드렁했다. 아주 간절한 일도 아니고 썩 가고 싶은 회사도 아니지만 한 번 다녀보지 뭐, 하는 반응이었다.


그 뒤로 몇 번 직장을 옮겼고 나중엔 대기업에 갔던 것 같다. 결혼 소식은 같은 업계에 있었던 다른 선배로부터 전해 들었다. 네? 진선배가 결혼을 한다구요? 부랴부랴 전화를 걸었더니 진선배는 어느 일에도 놀라는 일 없는 성격답게  "그냥 그렇게 됐어"라고 했다. 내가 알던 그 오빠는 아니었다.


결혼식장은 서초 성당이었다. 일부러 연락을 많이 안 했는지 신부 하객이 적었다. 신랑은 뭐 하는 사람일까? 얘기 들어보니 의사 같은데? 별로 놀랍지 않았다. 이후 연락은 자연스레 끊어졌고 내 연애로 인한 고민이 절정이던 시절 문득 선배 생각이 났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문자를 보냈다. 지금 남친을 부모님이 너무 반대하시는데 어쩌구저쩌구, 언니는 예전에 어땠어? 담담하게 육아 중이라는 근황을 전하며 진선배는 남친과 엄마를 한 번 만나게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남친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면 답이 나올 거라고.


그게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기억이다. 카톡도 안 하는 진선배. 인스타 페북 그 어디서도 흔적조차 없다. 돌이켜보면 싸이월드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던 것 같다. 남들에게 자신을 보여주려는 욕망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혹은 그 욕망 참 부질없다는 걸 너무 잘 아는 사람처럼. 처음 만난 스무 살 시절에도, 마흔이 된 지금도 진선배는 한결같이 그렇게 잘 살고 있을 거다. 카톡 프사 뭘로 바꿀까 하는 고민은 전혀 안 하면서. 행복해 보이는 인스타 전시용 사진을 고를 필요 없이. 타인의 일상을 기웃기웃거리지 않으면서.


진선배는 뭐할까.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궁금한데 불쑥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렇게 가끔 떠올려 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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